윌리엄 월버포스 (William Wilberforce,1759-1828)
“왜 그런 세상일에 교회가 에너지를 낭비합니까? 노예들의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사명입니다!” “왜 당신은 기독교와 노예제도가 아무 상관이 없는데 교회에서 자꾸 노예제도 폐기를 얘기를 합니까? 그건 정치적인 것이고, 우리의 신앙은 개인적이고 영적인 것인데 자꾸 이런 얘기를 해서 교회에서 분란을 일으키나요?” 이는 윌리엄 월버포스가 노예제도를 폐지하려고 할 때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들은 얘기이고, 링컨이 노예해방을 하려고 할 때, 교인들에게서 들은 얘기이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흑인 민권운동을 할 때 동료 목사들에게 무수히 들었던 얘기이기도 합니다.
200년 전, 영국은 세계 제일 가는 노예 무역국이었습니다. 1500만에서 최대 4000만 명에 이르는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팔려갔고, 실로 인류가 저지른 죄악 가운데 이보다 더 잔인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영국과 식민지 신생 미국에서는 노예무역이 성공적인 사업이자 국가적 정책이었습니다.
윌리엄 월버포스는 영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21세의 나이로 요크셔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25세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타락한 당시의 영국 정치계를 떠나 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을 작사한 존 뉴턴 (J. Newton) 목사가 그의 멘토였습니다. 예수 믿고 정치계를 떠난다고 했을 때 뉴턴 목사는 윌리엄에게 이렇게 권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달리 부르셨다. 부르심은 목회자가 되는 것만이 아니다. 당신의 목회지는 영국국회다. 당신은 영국 국회의 목회자다”라 하면서 정치를 계속할 것을 충고 했습니다.
윌버포스는 노예무역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가장 큰 범죄로 보고 노예제도를 없애는 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으로 여겼습니다. “노예 매매는 너무 엄청나고 무시무시 하며 치유할 수 없는 악습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폐지하기 위해 싸우기로 굳게 결심했다. 결과가 어떠하든 간에 나는 이 시간부터 폐지가 성사될 때까지 결코 쉬지 않겠다.”
사람들이 가장 민감한 것은 손해 보는 일입니다.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것은 엄청난 손해를 가져오는 것이기에 그는 많은 조롱과 극심한 반대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국회의원으로서 노예무역에 대한 법안을 제출했으나, 노예제도는 오랜 관습으로 과거나 그 당시 세계에 만연하던 제도라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윌버포스의 오래고 끈질긴 헌신을 통해 그가 죽기 3일 전인 1833년 7월 29일 (74세) 상하원 모두 통과되어 노예제도가 영국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45년간의 수많은 반대와 위협과 박해속에서도 믿음으로 이겨내 결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가장 복음적이고, 성경에 충실한 방법으로 평생을 걸려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사회개혁을 믿음으로 이끌어 낸 것입니다.
생전에 대천덕 신부는 예수원에서 새벽 기도모임을 인도할 때 그날 그날의 신문 기사들을 편집하고 복사해서 나눠주며 기도 모임을 인도 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 대천덕 신부는 기독교인들이 사는 동안 진정으로 이 땅을 변화시키고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일 하고 기도해야 하는 존재들 이라는 것을 늘 일깨웠 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한 윌리엄 윌포스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방식으로 정치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에게 자유를 주었고, 희생을 막은 그리스도의 제자였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의 어록:
“만약 당신이 잘못된 생각으로 자신의 삶을 망치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냉정하고 무심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