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은 읽고 (Lectio),
묵상하고 (Meditatio),
관상하고 (Contemplatio),
기도하고 (Oratio),
실천하는 (Incarnatio) 것입니다
성경은 읽는 것이 아니다. 듣는 것이다. 아니 성경이 나를 읽는 것이다. 내 상태, 내 모습이 성경의 빛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린 기도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읽고 (lectio), 묵상하고 (meditatio), 관상하고 (contemplatio), 그래서 얻은 깨달음으로 고백하며 기도하고 (oratio), 최종적으로 그 말씀을 살아내는 것 (incarnatio)이다.
우린 성경을 읽고 (lectio) 그 말씀을 들은 원 저자의 영감이 내 의식 속으로 떠 오르도록 기다려야 한다. 지난 한 과정이다. 왜냐하면 우린 끊임없이 올라오는 생각의 바다에 빠져 무척 산만 해져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내가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 줄도 모른 채 생각에 사로 잡혀 영문도 모른 채 살아간다. 흙탕물이 잔뜩 낀 강물처럼, 후회와 좌절과 미움과 서러움으로 가득 찬 생각의 강물 속에서 살아간다. 무엇이 물이고, 무엇이 불순물인 줄도 모른 채 흘러 만 간다. 우선 숨을 가지런히 모으면서 생각이 가라앉길 기다려야 한다. 들 숨과 날 숨에 집중하면, 온갖 잡생각이 왔다가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 보라. 가만히 그러는 자신을 지켜보라. 하늘에 흐르는 구름처럼, 가로막지 않고 흐르게 내 버려 두라. 생각이 오고 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 보기만 하면 된다. 생각의 소용돌이를 “내 버려 두고 가만히 관찰자가 되는 것”이 기도의 첫 걸음이다. 호흡과 지켜 봄이 익숙해지면, 생각이 가라앉고, 맑은 기운이 나를 감쌀 것이다. 그리고 말씀이 말을 걸어 올 것이다. 이것이 묵상 기도 (meditation)이다.
그 다음은 말씀 속으로 내가 들어 가야 한다. 이름 하여 관상 기도라는 것이다. 성경 속으로 들어가 느끼고, 바라보고, 냄새 맡고, 들으며 오감을 이용하고 말씀 속으로 들어가는 기도다. 생각에 사로잡혀 사는 우리들에게는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훈련이 안되어 있어 성경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너무도 고통스럽다. 더구나 여러가지로 중독되어 있는 우리들에게는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기도이다. 죽을 병에 걸렸다든지, 실연을 했다든지, 파산을 했다든지 극적인 상황과 대면하기 전까지는 좀처럼 우린 포기를 모른다. 내가 (ego)가 사라져야 비로소 얼굴을 내미는 것이 하나님이 원래 창조해 주셨던 본래의 나다. (the true self) 처음처럼, 마지막 순간처럼 그렇게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 관상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 모세가 경험했던 떨기 나무에 불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평범한 일상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순간 이다. 이때, 이사야 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사6:5)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서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행9:8-9) 관상의 상태이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이는 순간이다. 하나님이 내 의식과 존재를 사로잡는 순간인 것이다.
이런 경험이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는” 기도의 순간이 온다. 하지만 우리들이 드리는 기도의 대부분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기 독백, 푸념인 경우가 많다. 침묵과 관상 속에서만 떠오르는 기도인데, 자기에 빠져 자기 독백만 풀어 놓다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들을 여유가 없이 다시 자기에게 빠진다.
기도의 완성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시는” 우리들의 일상, 우리들의 삶 속에 있다. 일상 속에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극치일 것이다.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도달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사랑하지 않으면 안될 상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당위의 세계가 열리고, 이 기도는 행복한 순간이 된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겸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를 넘어서서 (ego) 원래의 내 모습 (the true self)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죽기 보다 어려운 일 일진데, 내가 어찌 겸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듯 어려운 기도, 이런 기도할 수 없는 자신에 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몬 베드로가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 이로소이다 하니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눅 5:8, 10)
주색으로 집안을 망친 한 사나이가 극적으로 회개하여, 빛나는 생애를 보냈다. 세계적 문호 레 미제라블, 노틀담의 곱추를 지은 작가 빅토르 위고이다. 어느 날 위고의 외동딸 레오포르딘의 시체가 세느강에서 발견되었는데 시체 옆에는 아버지의 심한 외도와 과음, 거기에 짓눌려 사는 비참한 엄마 때문에 살 의욕을 잃고 자살 한다는 유서가 발견된다. 위고는 “이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라 고백하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된다. 드디어 그에게 기도가 시작된 것입니다. 공무원이 되어 헌신적으로 일해 프랑스 교육부 장관까지 지내고, 프랑스 최고의 유공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80세 생일이 국가의 공휴일로 지정된다. 위고의 마지막 유언은 이랬다. “하나님과 영혼, 책임감. 이 세 가지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적어도 나에겐 충분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입니다. 나는 그 속에서 살아왔고 그 속에서 죽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앞으로 4만프랑의 돈을 남깁니다. 극빈자 들의 관 만드는 재료를 사는 데 쓰이길 바랍니다. 내 육신의 눈은 감길 것이나 영혼의 눈은 언제까지나 열려 있을 것입니다. 저를 위한 교회의 추도식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라는 것은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단 한 사람의 진실한 기도면 충분합니다.”
9월, 10월 두 달 동안 매주 요한복음을 묵상 할 것입니다. 우리 요한복음을 여러 번 읽으면서 우리들의 의식 속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관찰해 봅시다. 아주 좋은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