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로 들어가며 - 손잡고 더불어, 주님의 식탁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내면을 숨기지 않고, 기쁨과 슬픔, 갈망과 상처를 진솔하게 드러내는 사람을 에니어그램에서 4번, 개성추구자 혹은 예술가라고 합니다. 형식보다 진정성을 중시하며, 공감을 잘하며 정서적 민감한 사람입니다. 남의 아픔을 빠르게 알아차리고, 대신 울어주고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도 분명합니다. 남과 비교했을 때 부족해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기 쉽고, 감정에 오래 머물다 보면 감사와 현재의 은혜를 놓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감정에 머물기 쉽습니다.
오늘은 사울 왕과 막달라 마리아라는 두 인물을 통해 자신을 바라봅니다. 갈망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갈망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선택받고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끝내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꼈고, 다윗이 등장하자 그 불안은 비교와 질투로 변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자신에게 없는 것, 다윗이 가진 것에 집착했습니다. 그 결과 사울의 세계는 점점 좁아지고, 관계는 무너지고, 하나님과의 거리도 멀어집니다. 사울의 비극은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것을 감사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깊은 내적 상처에서 시작되지만, 예수님의 사랑 앞에서 끝까지 머무는 충실함을 보입니다. 십자가 곁에 남고, 무덤 앞에서도 떠나지 않습니다. 빈 무덤 앞에서 흘리는 그녀의 눈물은 단순한 슬픔만이 아니라 혼자남은 두려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실 때, 마리아는 더 이상 상실이나 수치로 자신을 정의하지 않고, 사랑받는 존재로 다시 살아 납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그녀는 집착을 내려놓고,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이 두 인물은 분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울은 붙들다가 무너지고, 마리아는 놓아줌으로 살아납니다.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비교, 질투, 오래된 상처는 아닙니까? 감정을 부정하는 것이 치유가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치유입니다. 갈망을 내려놓을 때, 빈 무덤조차도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