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전주 Prelude – 인도자

예배로의 초대 Call to Worship -다같이


찬양 Praises – 다같이

존귀 오 존귀하신 주

우리 보좌 앞에 모였네


조용한 기도 Invocation – 다같이

공감의 삶을 소망하시는 주님의 바램을 묵상하며, 조용히 기도합니다.

Pray silently contemplating God’s desire for the life of compassion.


찬송 Hymn

274장 주 예수 넓은 사랑


대표기도 Congregational Prayer – 김지영 권사


+성경봉독 Scripture Lesson 누가복음 16:19-31 | Luke 16: 19-31- 김희자 집사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다.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22 그러다가,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고, 그 부자도 죽어서 묻히었다. 

23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26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조상님, 소원입니다.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나는 형제가 다섯이나 있습니다. 제발 나사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고통 받는 이 곳에 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29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30 부자는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그들에게로 가야만,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31 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말씀 Sermon “더불어 서 있는 땅에서” - 최진용 목사

“On the Ground We Stand Together”

참 좋으신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여러분 삶이 서 있는 모든 자리에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지난 목요일이 절기상으로 가을에 들어섰음을 알려 주는 날이었습니다. 추분(Fall Equinox)이었기 때문입니다. 봄에 들어서는 춘분도 그렇지만, 가을에 들어서는 추분 역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을 기준으로 가을의 시작을 삼습니다. 따라서, 이제 부터는 낮의 길이보다 밤의 길이가 길어지는 시간에 우리 모두 들어선 것입니다. 길어지는 저녁과 밤의 시간을 예상하며 계절의 변화를 맞아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낮의 길이가 짧아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우리로 하여금, 맑은 가을 햇살에 밝게 빛나는 <낮의 시간>을 소중히 느끼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낮의 길이가 짧아지는 것을 느낄수록 아쉬움이 커지겠지만, 그와 함께 우리 주위를 환하게 빛내주는 가을햇살에 대한 <고마움> 또한 커지겠지요? 아무쪼록 우리가 본격적으로 접어든 가을의 시간 안에서, 소중한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알찬 삶의 결실을 거두는 기쁨과 행복이 우리를 찾아오길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 행복을 원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아마도 없겠지요? 우리는 모두 행복, 혹은 행복한 삶을 원하며, 각자 나름대로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행복을 얻으려 애쓴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원하는 행복은 많은 경우 우리의 <욕망>에 기초한 것이고, 우리의 욕망은 우리가 다스리려고 힘쓰지 않으면 한없이 부풀어 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행복을 지향하며, 행복의 열매를 거두려 애쓰더라도, 우리의 욕망의 <값>이 계속 커지기만 한다면, 우리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지속적인 불만족에 시달릴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 3월에 유엔 산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크워크(SDSN)>에서 “2022년 세계 행복보고서”를 공개했습니다. 2012년 부터 세계 각 나라들의 행복을 ‘정량화/수량화’해서 행복지수로 분석해 주고 있습니다. 행복지수는 나라별로 1000명의 시민들에게 삶의 만족도를 조사하는 방식으로 평가됩니다. 그 평가의 기준은 국내총생산(GDP), 기대수명, 사회적 지지, 자유, 부정부패, 관용 등의 6가지 항목이고, 이 항목에 해당하는 자료 3년치를 분석해서 행복지수를 산출합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행복지수 1위는 핀란드(7,821점)입니다. 덴마크(7,636점) 가 2위였고, 그 외에 스웨덴 (7위, 7,384점), 노르웨이(7위, 7,384점) 등의 북유럽 국가들이 10위 권에 들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은 6,977점으로 15위를 기록했고, 동 아시아 국가 중에는 대만(6,512점)이 26위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습니다. (한겨레신문, 2022년 3월 19일자) 한국이 몇 위였을지도 궁금하시지요? 한국의 행복지수는 5,935점으로, 59위였습니다. 한국보다 앞에 랭크된 나라들로는 우즈베키스탄 (53위, 6,063점), 일본(54위, 6,039점), 아르헨티나 (57위, 5,967점), 그리스(58위, 5,948점) 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에 살고 있으니, 우리의 행복지수는 세계 15위에 해당할까요? 아니면, 한국 사회에 여전히 밀접한 관계와 그 영향 아래 살아가니 59위에 해당할까요? 아마도, 15위와 59위 사이에 어디쯤, 우리의 행복지수가 놓여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자료에서 한국에 대한 분석 중 흥미로운 것은, 국내총생산(GDP)와 기대수명에는 비교적 높은 수치를 기록했지만, 나머지 4항목, 사회적 지지, 자유, 부정부패, 관용에서는 낮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입니다. 특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E)에 속하는 38개 회원국만 놓고 보면, 한국은 최하위권에 속했습니다. 한국의 행복지수가 그리 높지 않고, 특히 기대 수명과 국민총생산에 비해 다른 지표가 많이 낮게 평가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한국 사회, 그리고 고국인 한국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는 한인 이민공동체에 대해 깊은 고민과 분석을 하게 합니다. 행복, 혹은 행복한 삶을 위해서 전력을 다하며 살아감에도, 행복함을 느끼는 정도가 높지 않다면, 분명 무언가 중요한 것이 그 과정에 결핍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쉬지 않고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감에도, 그 삶의 노력과 수고를 통해 <행복감>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 과정 속에 무언가가 수정되고, 보완되고, 보수되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지난 주일에 나누었던 일화 기억하시지요? 자신의 사는 집을 <불편당>이라 이름짓고, <불편해도, 제법 행복합니다>라고 말하던 목회자요, 시인인 고진하 목사의 삶에서 행복은 외형적으로 이루어 가는 삶의 조건이나, 삶의 구조에 달려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은 삶의 의미를 구현해 내는 내면의 힘에 달려 있고, 삶의 가치들을 창출해내는 삶의 지혜에 달렸으며, 삶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삶의 눈과 삶을 노래에 귀를 기울일 줄 하는 삶의 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해지려는 욕구와 욕심을 내려 놓고, 불편하고, 부족하더라도, 만족과 감사 속에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행복의 비결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의 동의어는 감사와 만족이고,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닌, 불평과 불만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묵상하는 복음서 말씀인 누가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부족한 것 없이, 매일 매일 삶의 향연을 즐겼던 <한 부자>와 매일 매일 가난과 배고픔, 그리고 질병 속에 아픔과 신음 속에 살았던 <거지 나사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것 없이 축제를 즐기고 살았던 부자는 보통의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행복한 사람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거지 나사로는 아주 불행한 사람입니다. 매일 고통과 아픔 속에 살았고, 따라서 행복할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부자와 나사로는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무런 교류도 없었습니다. 더불어 서 있는 땅 위에서, 그들은 더불어 함께 있지 않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서로 서 있는데, 그들은 서로 따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거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각자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 사이에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에게도 둘 간의 <거리>가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19절은 둘 사이의 거리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다.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거지 나사로는 부자가 사는 집의 <대문 밖>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자와 나사로의 삶의 자리를 구분지어 주는 <대문>의 <안>과 <밖>의 <삶>에는 아주 큰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대문 안>에서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반면, <대문 밖>에 있던 거지 나사로는 헌데 투성이의 몸으로 누워서, 매일 잔치가 벌어지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며 살고 있었습니다. 

<대문>을 <사이>에 두고 살고 있었던 두 사람의 삶은, 비록 물리적으로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둘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멀어 보입니다. 부자는 거지 나사로의 존재 자체를 인지하고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거지 나사로 또한 부자의 삶으로부터 한없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대문>을 사이로 두고 있었던 두 사람은 아무런 접촉도 하지 않은 채, 아주 가까운 지리적 거리 안에서, 한 없이 멀리 떨어진 심리적 거리를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자에게 거지 나사로는 <투명인간>에 불과했고, 그가 겪고 있었던 삶의 아픔과 고통은 그의 삶과는 <무관>했습니다. 

심리학과 커뮤니케이션학에서 <근접공간학Proxemics>라고 부르는 학문분야가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 곧 인간관계에서 형성되는 공간 또는 거리를 분석하는 학문분야입니다. 1963년, 이 용어를 처음 만든 인류학자 Edward Hall은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4가지로 구분합니다. 친밀한 거리, 개인적 거리, 사회적 거리, 그리고 공적인 거리입니다. 그에 따르면, 친밀한 거리(intimate distance)는 서로를 끌어 안거나, 만지거나, 귓속말을 할 수 있는 거리로, 18 inch (46cm) 까지의 거리입니다. 연인이나 가족 간의 거리가 이 거리에 해당합니다. 개인적 거리 (personal distance)는 4 feet (122cm)까지의 거리 곧,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로 평소 친분이 있고 호감을 가진 지인들의 관계입니다.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는 서로 친분이 있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로, 12 feet(3.7m) 까지의 거리입니다. 일적인 관계로 만나는 거리를 뜻하는 사회적 거리는 지난 팬데믹 기간 동안 빈번히 시행해 왔던 <사회적 거리 두기>를 통해 우리에게도 이미 익숙한 거리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공적인 거리(public distance)가 있는데, 이것은 강연이나 행사를 할 때 형성되는 거리로, 25 feet(7.6m) 이상의 거리를 말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거리>를 근접공간학을 통해 산출해 본다면 어떤 거리에 해당될까요? 안타깝지만, 둘은 멀지 않은 거리에 살고 있었음에도, 이 네가지 유형의 거리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친밀한 거리나 개인적 거리에는 전혀 근접하지 않고, 사회적 거리나 공적인 거리의 기준에서 조차, 두 사람은 만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대문 하나> 사이를 두고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들의 삶이 자리는 측정할 수 없을 만큼, 먼 거리에 서로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이 한없이 멀어보이는 삶의 거리에 가장 기여를 한 것은 <부자의 무관심>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질병에 시달리며 아팠던 거지 나사로에게는 고통을 알아 주고, 그에 대한 연민과 돌봄을 통해 그의 <곁>에 있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부자는 그의 고통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부자는 더불어 서 있는 땅 위에서,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거지 나사로를 지나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거지 나사로와 부자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고, 부자는 죽어서 지옥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던 부자는 어느 날 고통을 받던 중 멀리에서 아브라함을 보게 되었고, 아브라함의 품에 나사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아브라함을 부르며 말했습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대문 안>에서 호사로운 삶을 누리던 부자와 <대문 밖>에서 질병과 배고픔에 신음하던 거지 나사로의 운명이 뒤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 뒤집힌 운명 속에 부자는 괴로워하고,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행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대문>을 사이에 두고 있었던 두 사람의 거리가 이제 더할 나위 없이 멀어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신의 혀를 시원하게 해 달라는 부자의 청을 아브라함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너무 매정하게 느껴지는 아브라함의 대답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제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있는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구렁텅이의 양쪽에 있는 두 사람은 서로 건너 다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말합니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다.’ (눅 16:25-26) 여기서 <구렁텅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스마아>는 “벌어진 틈”을 가르키는 말로, 이스라엘의 사막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막지역에 있는 <협곡>이기에, 이 곳은 우기 외에는 항상 물이 없는 척박한 곳입니다. 이 척박한 협곡이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 놓여 있기에 부자는 그 협곡을 넘어서 나사로 있는 곳으로 건너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 놓인 이 <큰 구렁텅이>는 죽은 후에만 놓여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문 밖에 있던 나사로로부터, 그만큼 깊은 무관심과 단절과 무소통의 <협곡> 또는 <구렁텅이>를 부자 스스로 이미 만들며 살아 왔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만들었던 나사로와의 거리가 곧, 그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과 나사로로부터 떨어져 있는 그 거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거리는 곧, 그와 하나님과의 거리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가 만일 이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살았을 때 나사로와의 거리를 좁히며 살았었을까요? 그가 만일 이것을 미리 짐작했더라면, 대문 밖에 있었던 나사로가 한없이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닌, 더불어 서 있는 땅 위에 함께 살아갈 사람이었음을 깨달았을까요?  

여러분, 부자에게 나사로는 <시야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의 집 대문 밖에 있었음에도, 나사로는 부자에게 <있으나, 사실은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인>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부자의 눈에 나사로가 띄였을 때는 나사로가 그의 대문 밖이 아닌, 저 멀리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을 때였습니다. 가까이 있을 보이지 않던 사람이 저 멀리 있을 때 마침내 보이게 된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참 흥미로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으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깨닫습니까? <대문 하나>를 사이에 두었던 부자와 나사로의 <거리>는 그들이 죽은 후 <큰 구렁텅이>를 사이에 두고 한없이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거지 나사로의 삶에 조금의 관심과 공감도 없었던 부자에게, 그와 나사로의 거리는 이미 그만큼 멀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한 걸음 걸어나가면 손에 닿을 거리에 있었던 나사로가 부자에게는, 후일 죽어서 구렁텅이를 사이에 오갈 수 없었던 그 거리만큼이나, 이미 먼거리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 주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살아온 삶을 자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서로 서로에게 <곁>을 내어주며 살도록 지음받았습니다. 창조의 동산에 삶의 자리를 처음으로 만들어 주셨던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떠올려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자신의 <동반자> 하와를 처음 마주하며, 아담은 노래했습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 여기서 남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잇쉬>이고, 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잇샤>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우리가 보는 것처럼, 남자와 여자, 아담과 하와, 그리고 잇쉬와 잇샤는 서로 <친밀한 거리> 속에 <곁>을 내어 주는 사이로 지음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비극은 이 <거리>가 파괴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동반의 관계에 금이 가고, 서로에게 내어줄 <곁>에 <협곡>과 <구렁텅이>가 놓이고, 더불어 서 있는 땅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과의 관계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멀어지면서, 공감과 소통의 세계 대신, 단절과 불통의 세계가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3년에 가까운 팬데믹의 시간 동안 사람 사이의 거리는 더욱 멀어져 왔습니다. ‘접속은 늘었지만, 접촉은 줄었다’고 표현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오며, 우리는 쉽게 외로움과 우울함에 휩싸이는 삶의 조건 속에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은 함께 길을 걸어갈 <동반자>와 <길벗>을 간절히 염원하면서도, 떨쳐내기 힘든 외로움과 슬픔, 그리고 고독과 씨름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런 때를 살아가며, 오늘 예배의 자리에서 귀 기울여 듣고, 묵상하게 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자칫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사람들과의 <거리>를 묵상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는 <더불어 서 있는 이 땅에서>, 많은 삶의 동반자를 만들어가며, 사랑을 나누고, 타인의 삶에 공감하고,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연민하며 살아갈 소명을 향해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타인과의 거리를 한없이 증폭시키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요? 더불어 함께 살아가라고 한 자리에 불러 주신 사람들과의 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 놓였던 <협곡>과 <구렁텅이>처럼, 한없이 멀어진 것은 아닌가요?  

러시아의 민담에 나오는 한 <은자>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 삶의 모습을 돌아보게 해 줍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오래 전에 한 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순진무구한 정신을 지니고, 맑은 심성을 소유하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숲속의 동물들과 하늘의 새들도 이런 그를 알아보고 짝을 지어 그에게 찾아와서 그가 전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이야기에 취할 정도로 그는 영향력 있는 숲속의 은둔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에 그가 <사랑>에 대해 말하려 했을 때, 표범이 머리를 들며 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려 하십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동반자는 어디 계신지요?” 표범에게 은자가 대답했습니다. “나에게는 동반자가 없소.” 그러자 은자의 주위에 모여 있던 짐승과 새들이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동반자와 함께 겪었던 자신의 체험도 없이 어떻게 우리에게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단 말인가요?” 결국 짐승과 새의 무리들은 은자를 그곳에 홀로 남겨둔 채 조용히 떠났습니다. 그 날밤 은자는 자기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비통하게 울면서 후회로 가슴을 쳤다고 합니다. (고진하, <고통받는 자 곁에서 울어주지 못하는게 가난>, 한겨레신문 2022,9,17) 

<사랑에 관해> 말하고 자하면서, 정작 그 사랑을 나누는 <동반자>는 없었던 한 은자에 관한 이 민담은 우리삶의 <중심>을 점검 하도록 안내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안겨주신 <구원의 복음>과 <가없는 사랑과 돌봄>, 그리고 <용서와 포용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고, 그것을 나누고 전하며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명은 구체적인 우리 삶의 일상의 자리에서 꽃을 피워야만, 그 소명의 참 의미가 살아납니다. <사랑에 관해> 이야기 하는것과 <사랑을 이야기 하는것>은 다릅니다. 사랑에 관해 이야기 하는것과 사랑을 실제적으로 체험하고 나누는 것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를 열어가는 소명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나누어주신 사랑과 돌봄과 나눔과 포용에 대해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한복판에서 우리의 이웃들로 하여금 그것을 체험 하도록 하는일에 전력을 다하며 살아야 하는것 입니다. 이것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라는 복음의 거룩한 도구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서로를 가르고 나누는 장벽을 철폐하고, 사람 사이에 놓인 <협곡>과 <구렁텅이>를 메우고, 보수하는것 입니다. 더불어 서 있는땅에 살아감에도, 대문밖에 고통과 신음속에 살아가던 나사로와 한없이 먼거리에서 살았던 부자의 모습과 우리삶의 모습이 만일 닮아 있다면, 우리는 속히 옛사람의 어리석은 모습을 벗고, 새 사람의 맑고 선하고 참된 모습을 입고 살아가기 위해 전심을 다 해야할 것 입니다. 우리삶의 여정이 세상 여기저기,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 이곳 저곳에 깊고 움푹하게 파인 협곡과 구렁텅이를 메우고, 높게 세워진 장벽을 허물고, 두껍게 쌓아올린 편견과 오해의 벽을 무너뜨리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일과 짝을 이루길 기원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신실한 인도하심이 여러분 모두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헌금 & 찬양 517장 생명 진리 은혜 되신 – 다같이

Offerings & Offertory Music (** 마지막 절은 일어서서)


+감사와 봉헌의 기도 Prayer of Thanksgiving – 기도인도: 최진용 목사


+결단찬양 Closing Hymn 539장 이 몸의 소망 무엔가 – 다같이


+축도 Benediction – 최진용 목사

+가능하신 분은 일어서서 Please stand, as you are able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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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이 시기에 우리 교회가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그 사역을 감당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함께 해 주시기 바랍니다.

헌금방법은 현재로서 3가지입니다

1.은행을 통해 직접 Transfer하는 방법

2.헌금을 교회에 직접 보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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