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시간: 오전 9시 30분
예배 인도: 이재숙 장로
전주 Prelude
예배로의초대 Call to Worship
찬양 Praises
아무 것도 두려워 말라

언제나 내 모습

조용한기도 Invocation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묵상하며, 조용히 기도합니다.
Pray silently contemplating the prayer taught by Jesus.
찬송 Hymn
43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

대표기도 Congregational Prayer
윤순정 권사
+성경봉독 Scripture Lesson
누가복음 11:1-13
권세중 집사
Luke 11:1-13
1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기도를 마치셨을 때에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에게 말하였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여라.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고,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십시오.
3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십시오.
4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우리가 용서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가 밤중에 그 친구에게 찾아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내게 빵 세 개를 꾸어 주게.
6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내게 왔는데, 그에게 내놓을 것이 없어서 그러네!’ 할 때에,
7 그 사람이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누웠네. 내가 지금 일어나서,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그가 졸라대는 것 때문에는,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10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된 사람으로서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12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말씀 Sermon
“구하는사람에게성령을주시는”
최진용목사
“God Who Gives the Holy Spirit to Those Who Ask”
<설교문>
참 좋으시고 은혜로우신 주님의 사랑과 도우심이 여러분 삶과 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큰 더위가 우리 삶을 찾아 왔습니다. 뉴잉글랜드에 살며 이렇게 더웠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불볕 더위가 며칠 째 계속 되고 있습니다. 더위 속에서 더위와 씨름하며 일하고 계신 교우 여러분들 모두, 건강 상하지 않고, 강건히 계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 가운데 묵상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기도>가 포함된 누가복음서 본문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기도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기도>입니다. 가장 오래되었기에, 가장 많은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께 드려진 기도이기도 합니다. 어거스틴은 주기도문이 지닌 큰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제대로 기도하고 있다면, 기도 중에 무엇을 말하든 이미 주기도 안에 담긴 것을 말하는 셈이다.”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가르침을 주는 어거스틴의 주기도문 해석입니다. 여기서 제게는 <제대로 기도하고 있다면> 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이 말은 제대로 기도하지 못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제대로 기도하고 있다면,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것이 주기도문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지만, 제대로 기도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울타리를 제멋대로 벗어나, 엉뚱한 자리를 방황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점을 일찌기 제자들이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묵상하는 누가복음서의 시작에서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주님,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주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한 제자의 요청은 너무도 훌륭한 요청 혹은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주님의 제자들 중 누가 이런 말을 했을까 궁금한데, 누가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이 요청이 누구의 것인지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궁금하네요… ^^
우리는 보통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그 기도를 <열심히> “배워야 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편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생활에서 기도처럼 배움이 필요한 것이 또 있을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을 진정으로 구해야 할지 깊이 배우거나, 생각, 혹은 반성하지 않고, 다만 열심히 구하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라는 제자의 요청은 바로 우리가 늘 주님께 구해야 하는 요청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말은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기도 가운데 무엇을 구해야 할까요?” 라는 질문으로 변화해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구해야 할지 분명히 배우게 된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자연스럽게 배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할지 깊이 고민하고, 묻고, 생각해 보지 않고, 다만 우리의 욕망의 시선이 향하는 대로 <기도>라는 하나님과의 소통 창구를 열고자 합니다. 제가 오래 전에 인용했던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문구 기억나시지요? 프랑스의 문학가 폴 부르제가 한 말입니다. 삶에 휩쓸려 끌려 가듯 살다 보면, 우리의 생각이 삶의 움직임에 끌려가게 됨을 경계한 이 말을 우리는 기도와 관련해서 이렇게 전환해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구해야 할지 배우지 않고 기도하면, 기도하는 대로 구하지 않고, 구하는 대로 기도하게 된다.” 우리가 <구하는 것>은 <욕망>이라는 우리의 본성에 씌워진 필터를 통해 형성되기 쉽습니다. 우리의 욕망은 <더 많이> 라는 언어에 중독되기 쉽고, <아직 충분치 않아>라는 언어에 사로잡혀 있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배우기 위해, 무엇을 구해야 할지 배우는 것이 필요하고, 무엇을 구해야 할지 배워가면서, 어떻게 기도할지 깨우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이 그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는 제자에게 주님께서는 <주님의 마음이 담긴>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고,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십시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십시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우리가 용서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무엇을 구해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속에서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이 땅에 각인되도록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길 구하는 것이고, 매일 매일 우리가 먹을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우리의 죄가 용서받기를 구해야 하고,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우리가 용서 받았듯 용서할 수 있기를 구하는 것이며, 살아가면서 연약함의 순간을 끊임없이 넘나드는 우리가 시험에 들어 방황하지 않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설교의 처음에 인용한 어거스틴의 말처럼,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기도 속에 우리가 바라고 구하고 소망하고, 그래서 기도에 힘써야 할 것들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바르게 기도한다면>, 어거스틴의 말처럼 우리의 모든 기도는 주님의 기도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주님의 기도 안에 모두 담겨 있고,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우리 기도의 중심으로 삼아, 그로 부터 배우고, 반복하고, 확장하고, 심화시키며 살아가는 것에 우리 믿음 생활의 중심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기도의 <시작>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시작할 때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것을 강조하십니다. 누가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신 것이 중요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그려지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의 자녀들을 위하여 온정을 베풀고, 자비로 감싸안고, 자상함으로 보살피며, 신실함으로 늘 곁에 있는 존재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상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마음을 아프게 하고 떠난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그리고 돌아온 아들을 마냥 기뻐하며 사랑으로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누가복음에서 우리에게 전해 주는 아버지의 모습이고,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께서 기도의 시작에 강조하신 점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고, 자애로우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들으시고, 그에 응답하신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기도의 시작이고, 복음서 저자 누가의 눈에 중요한 점이었습니다.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 주신 주님께서는 당시 팔레스타인의 관습을 통해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설명하십니다. 당시 관습에 따르면, 손님을 접대할 때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이웃을 거절하지 않은 것이 당신의 관습이었습니다. 이런 문화적 컨텍스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중 누군가가 손님의 방문을 받고, 밤중에 그의 친구에게 찾아가서, 그 친구에게 빵 세 개가 필요하다고 말하여 꾸어 달라고 하는 경우를 가정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누웠네. 내가 지금 일어나서,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 하고 말하겠느냐?” 이렇게 질문하신 후, 이어서 또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그가 졸라대는 것 때문에는,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문화적 관습에 근거해서, 이웃 접대시 급히 도움이 필요할 때, 그 요청을 이웃들이 서로 서로 돕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을 제자들에게 상기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웃끼리의 요청에 서로 마음을 담아 응답하는 것이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일일진대, 우리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이 가르침 끝에 우리 귀에 익숙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얼핏 들으면, 인간의 본성에 속한 욕망을 무제한으로 허용하는 것 같이 들리기도 합니다. 그 무제한적 욕망에 근거해 구하는 대로 구하게 해 주실 것이요, 찾는 것 마다 찾게 해 주시고, 열고자 하는 문마다 열게 해 주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다음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인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 <마음의 중심>에 <조율>하는 기도였습니다. 기도를 드리는 사람의 마음을 <바로 잡아 주고>, <바른 기도>를 드리는 <울타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기도의 역할입니다. 말하자면, 그 주님의 기도를 통해 이제 무엇을 구할지, 무엇을 찾아야 할 지, 또 어떤 문을 두드리며 인생길을 걸어야 할 지에 관한 영적 지혜를 얻게 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사람마다 받게 하시고, 찾는 사람마다 찾게 하시며, 문을 두드리는 사람마다 열린 문 앞에 서게 하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와 함께,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된 사람으로서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반문하시며,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살펴 주시는지 설명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기도>, 혹은 <기도의 자리>, 또는 <기도의 시간>은 우리의 믿음의 삶을 바르고, 건강하게 다듬어 주는 <정비소>와 같습니다. 또한 우리 삶의 믿음의 날개를 튼튼하게 유지해 주고, 그 날개가 바른 방향으로 날개짓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훈련소>와 같습니다. 주님께 드린 <주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요청이 너무도 훌륭하고, 귀중한 것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요청을 주님께 드린 제자는 기도가 우리의 삶의 이런 저런 바램을 아뢰는 것 그 이상임을 짐작했던 것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를 원했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있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며, 제자들을 비롯한 우리 모두에게 <기도의 학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기도의 학교를 거치며, 우리는 주님의 마음이 깃들어 있는 이 기도를 통해, <반복과 심화와 확장>의 훈련을 거치며, 우리의 구하는 마음과 찾는 마음을 다듬어 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기도의 훈련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 지, 무엇을 찾아야 할 지, 어떤 문을 두드려야 할 지, 분명하고 선명하게 깨닫게 될 것이고,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것을 구하게 하시고, 찾는 것을 찾게 하시며, 두드리는 문을 마침내 열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에 있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의 영적 삶에 달린 <날개>와 같습니다. 새가 바른 날개짓으로 날아갈 방향을 찾아가듯, 우리에게 신앙생활과 기도 생활에 있어서, <주님의 기도>는 ‘우리 삶의 방향,’ ‘우리가 꿈꾸는 소망의 바른 지향점,’ 그리고 ‘우리가 마침내 훨훨 날아올라 이르게 될 최종 목적지’를 선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 새들도 날아가기 위해 나는 연습을 하는 것 아시나요? 부리에 돌을 물고 하늘을 날던 새가, 입에 문 돌을 떨어뜨리고는 재빠르게 하강하여 떨어뜨린 돌을 다시 입으로 낚아채는 비행 연습을 통해, 새들은 사냥하는 능력을 유지합니다. 이런 연습 없이는 새들도 그 날개짓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구상에 생존했다가 멸종된 새 중에 도도새가 있습니다. 도도새는 인도양에 위치한 모리셔스 섬에 살던 날지 못하는 새입니다. 1505년 포르투갈인들이 향해 도중 발견한 모리셔스 섬에는 몸집이 큰 도도새가 살고 있었습니다. 도도새는 날지 못하는 새였습니다. 천적 없이 모리셔스 섬에 살고 있던 도도새는 어떤 누구도 자신들을 방해하거나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도새는 그만 날아가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울창한 숲에 다양한 종의 조류 외에는 다른 포유류가 없었던 탓에, 도도새는 날지 못해도 생명의 위험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찾아온 사람들이 문제였습니다. 포르투갈 선원들에게 몸집이 크고, 날지 못하는 도도새는 너무도 좋은 사냥감이었습니다. 신선한 고기를 원했던 선원들을 무분별하게 도도새를 포획했고,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후에 네덜란드 인들이 이 섬을 죄수들의 유형지로 사용했습니다. 이 때 죄수들과 함게 원숭이, 쥐 등이 섬으로 유입되었고, 계속 이어진 인간의 포획과 외부에서 유입된 동물들의 영향으로 도도새는 개체 수가 급격히 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681년 도도새는 인류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무분별한 욕심에 희생되어, 멸종되고 만 도도새가 만약 나는 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그렇게 무력하게 멸종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위협이 없었기에 날 필요가 없어 날아가는 기능이 퇴화되었지만, 환경이 바뀌어 날아갈 이유가 생겼을 때, 도도새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새에게 나는 연습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가 지닌 <믿음의 날개>에도 꾸준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 <기도의 삶>, 특별히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한 <기도의 훈련>은 우리가 주님께 선물받은 이 믿음의 날개에 힘과 능력을 길러주는 <학교요, 훈련의 장>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신앙인에게 나는 연습을 하도록 돕는 훈련의 장이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 삶을 도약을 이룰 수 있습니다. 새들이 나는 연습을 게을리 하면, 그 날개가 퇴화하는 것처럼, 우리 신앙인도 신앙생활의 날개인 기도의 삶, 그리고 기도의 삶에 중심을 잡아 주는 주님의 기도를 통한 기도 훈련에 힘쓰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의 날개도 점점 퇴화되어, 우리가 날지 못하는 새처럼 되고 말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기도> 라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달아 주신 <믿음의 날개>를 튼튼히 가꾸며, 믿음의 아름다운 비행을 삶의 곳곳에서 해 나가길 소망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드리는 자리는 우리의 믿음의 날개가 바른 지향점을 향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비행연습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과 찾고 지향해야 할 것을 바르고 선명하게 우리 삶의 지도에 기록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를 통해 다듬어진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사람마다 받게 하시고, 찾는 사람마다 찾게 하시며, 문을 두드리는 사람마다 열린 문 앞에 서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자비롭고, 자상하고, 따뜻하고, 신실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을 눈 앞에 그리며 예배의 자리에 함께 한 우리 모두에게 성령을 통해 주시는 응답과 위로가 임하길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함께 모인 이 예배의 자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구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성령”>은 우리 안에 다양한 <영적인 힘>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구하는 것을 구하게 되었으니, 우리 안에 <만족의 영>이 채워 질 것이고, 찾는 것을 찾게 되었으니 우리 안에 <평안의 영>이 채워 질 것이며, 두드리던 문이 열리게 되었으니 <기쁨과 화평의 영>이 우리 안에 채워 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구하는 사람에게 채워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풍성히 누리며, 만족과 평안과 기쁨의 삶을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아멘.
헌금 & 찬양
307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다같이

Offerings & Offertory Music
(** 마지막 절은 일어서서)
+감사와봉헌의기도
Prayer of Thanksgiving
기도인도: 최진용 목사
+결단찬양Closing Hymn
265장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축도 Benediction
최진용 목사
+가능하신 분만 일어서서 Please stand, as you are 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