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예배 시간: 오전 9시 30분

예배 인도:  장병준  장로

전주 Prelude

예배로의 초대 Call to Worship


찬양 Praises

빛 되신 주

더 원합니다


조용한 기도 Invocation

<말씀 안에 늘 거하는 삶>을  묵상하며, 조용히 기도합니다.

Pray silently contemplating the life of abiding in the Words .


찬송 Hymn

209장 주의 말씀 받은 그 날   


대표기도 Congregational Prayer 

문관옥  권사


+성경봉독 Scripture Lesson

누가복음 10:38-42

김희자  집사        

Luke 10:38-42

38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39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41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42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말씀 Sermon 

“곁에 앉아 말씀을 들으며”

최진용 목사

“Leaning on Him and Listening to His Words”

<설교문>

은혜와 사랑 가운데 우리를 도우시고, 보호하시고, 이끌어 주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삶 위에 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강물은 같은 곳을 두번 흐르지 않습니다. 강줄기를 따라 흐르고 또 흐르기 때문에 강물은 그 발길이 닿는 한 자리, 한 자리를 지나칠 때, 그 발길이 닿아 있는 <현재>에 충실할 뿐입니다. <다음>이 없기 때문에 강물은 어느 한 곳도 소흘이 지나치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어느 한 곳이 마음에 든다하여 그 자리에 멈추는 법도 없습니다. 다만 흐르며, 몸이 닿는 곳마다 마음을 오롯이 담아 <교류>할 뿐, 욕심을 내지도, 소흘이 지나치지도 않으며, <흐름의 본분>에 충실합니다. 우리 인생도 그와 같은 강물의 흐름처럼, 우리 인생이 흘러가는 인생의 강줄기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 삶의 순간, 순간 욕심을 내지도 않고, 소흘이 삶을 지나치지도 않게 된다면, <흐름의 본분>에 충실하며, 천국을 향한 인생의 순례길을 완성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를 살아라!> 얼마 전 부터 제 <삶 곁>에 머물고 있는 문구입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오직 내게 선명한 시간은 <현재> 뿐입니다. 우리가 늘 궁금해 하는 ‘미래’는 ‘미래’를 향해 오지도, ‘과거’를 향해 오지도 않습니다. 오직 ‘현재’를 향해서만 올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라는 우리에게 가장 선명하고, 유일한 순간을 무심코 흘려 보내지 말고, 그 순간 순간에 마음과 뜻과 영혼과 정성을 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에 붙들려 살아가고, <기억>에 얽매여 살아갑니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늘 <내일>에 가 있습니다. 앞으로의 삶에 안정과 평안과 평화가 풍성히 채워지기를 소망하는 한편, 그런 미래를 맞이하지 못할까봐 우리는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며, 우리의 <오늘>과 <현재>에 ‘근심과 걱정의 두터운 외투’를 입히고 살아가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찌기 제자들에게 <근심하고 염려하지 말라.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하고 당부하셨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복음 12:25) 이런 단상들을 이런 저런 때에, 떠 올리다가 마음 속에 찾아온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과연 한 순간이라도 <현재>를 충만하게 살아본 적이 있는가? 늘 <과거>를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아니면 오지 않은 <미래>를 대비한다고 마음을 늘 <내일>에 넘겨주고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아직 답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쓸만한 질문들’ 혹은 ‘의미있는 질문’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현재를 살아라!>는 삶을 향한 명령이 지시하는 삶의 실체에 조금씩 근접할 수 있게 되리라 희망합니다.

얼마전 소개한 적이 있는 조이스 럽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적은 책, <느긋하게 걸어라>에는 그가 순례길을 걸으며,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해 깨달은 것을 기록한 것이 나옵니다.

요즘은 내 사고에 쥐가 난 것 같다. 아일랜드에서 온 사람을 만났는데 나는 벨파스트나 더블린 같은 지명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톰 (함께 순례길을 걸은 친구) 과의 아침기도 시간에 내 모든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을 부를 때를 빼고는 “집”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내 사고는 왜 기억을 거부하는 것일까? 정말로 내가 “카미노 위에서” 현재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내 마음은 과거로 가기를 원치 않고 있다. (<느긋하게 걸어라>, 93)

사람에게 <기억>은 <과거로부터의 산물>입니다. <기억>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도 만들어 주는 <인생의 자산>이지만, 또한 <기억>은 우리의 삶에 떨쳐내기 힘든 <무게>를 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억을 거부하고 있는 나>, 그리고 <과거로 가기를 원치 않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조이스 럽은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된 것이겠지요? 그가 이어서 말합니다.

카미노에 오면 순례자는 현재 순간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정말로 그밖에는 갈 데가 없다. 카미노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길과 삶과 하나가 될 가능성도 그만큼 커진다. 웬만큼 걷다 보면 순례자는 점차 그냥 걷고, 그냥 다니고, 그냥 살게 된다. 한걸음 한걸음 떼면서 점점 더 또렷한 의식으로 매 순간 속에 들어선다. 모든 에너지를 현재의 상황에 쏟게 된다. 불편함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계속 건강하게 걸으려면 그래야 한다. (<느긋하게 걸어라>, 93-94)

조이스 럽의 말처럼, <현재 순간 속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길>이 우리 앞에 있다면 우리에게는 <현재를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조금 수월질 것 같습니다. 순례길을 걸으며 그가 경험한 것이 <그냥 걷고, 그냥 다니고, 그냥 살게 된 것>이라는 말하는 그의 고백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를 향해 깊은 울림을 주는듯 합니다. 그냥 걷고, 그냥 다니고, 그냥 살고, 그냥 숨 쉬는 것이 현재를, 우리 삶을 향해 불어오는 과거나 미래의 바람에 휩쓸리지 않게 하며 살아가는 열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누가복음서에서 두 여인을 만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입니다. 지난 주일에 묵상한 이른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같이, 오늘의 복음서 이야기도 우리에게 잘 알려지고, 익숙한 말씀입니다. <자비>를 베푼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다음에 등장하는 오늘의 이야기는 <손님 접대의 본질>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합니다. 집을 찾아온 손님을 바르게 맞이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융성한 대접을 위해 쉴 새 없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접대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찾아온 손님을 <선물>로 맞아들이고, 선물로 찾아온 손님을 풍성히 누리는 것일까요? 오늘의 복음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 앞에 서 있게 합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한 집에 살고 있던 마르다, 마리아 자매를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방문을 받은 두 여인은 각 자 다른 자리에서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언니 마르다는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여러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했습니다. 마르다는 ‘일하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에 집중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곁에 앉아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은 일로 분주하고, 동생 마리아는 ‘한가하게’ 예수님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서 마르다는 속상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방문을 받고, 자신을 일을 하고, 동생은 쉬고 있는 이 상황에 적잖이 마음이 상하게 된 마르다는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함께 거들며 일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마리아를 보며 마음이 상한 마르다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관심만을 쫓은 마리아를 향해 언니로서 할 수 있는 책망인 것이지요. 아마도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말을 듣고, 동생 마리아를 자신이 일하고 있는 자리로 보내실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의 답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마르다의 바램, 혹은 예상을 빗 나갔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귀하게 접대하려는 그의 행동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어떤 연유에서, 일 하지 않고 있는 마리아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예수님을 섬기는 <일>로 분주했던 마르다를 나무라고 계시는 것일까요?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이 있습니다. 마르다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잘 접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귀하게 대접할 자리가 아직 온전히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르다의 온 관심은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 자체>라기 보다는, <예수님을 대접할 접대의 자리>에 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목적어가 아니라, 예수님을 대접할 식탁이 목적어인 것입니다. 또한, 그에게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오신 <지금> 보다, 예수님을 귀하게 대접할 <잠시 후/조금 후>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 <잠시 후>를 완벽하게 준비하려 하니, 마음이 조금해지고, ‘지금’ 자신에게 찾아온 가장 큰 기쁨, 곧 <예수님께서 자신을 만나러 오셨다는 사실 그 자체>를, 감격 가운데 누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르다는 지금,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오신 <현재>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르다의 지금 모습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그의 가까이에 <지금>, 예수님의 <곁>이 <활짝> 열려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을 “목적어”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주어”가 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곁>이 제자의 삶에 있어서 <목적어>이고, 예수님의 <말씀>이 제자의 길에 있어서 <주어>인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차이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발 곁에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 곁을 삶의 목적어>로 누렸고, <예수님의 말씀에 그의 삶의 주어의 자리>를 넘겨 드렸습니다.

마리아에게 지금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잠시라도 예수님 <곁>에서 멀어지지 않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39절과 40절을 다시 한번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이렇습니다: “…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이 말은 마르다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할 때 마리아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 <말씀을 듣고만 있었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예수님께서 지금 진지하게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가르치시고 계시는데 마르다는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접대하는 일로만 분주했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마르다는 지금 <접대를 위해 염려하느라>, 예수님과의 <사귐>의 자리에 함께 한 자신의 <현재>를 마음껏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지금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닌, <말씀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접대하는 일>에 <우선 순위>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제자 여러분, <말씀을 하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경청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하고 계시는 <주님의 임재> 곁에 흔들리지 않는 영적 뿌리를 내리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시편 1편을 해석하면서, <율법을 묵상하다>에서 <묵상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가>는 <사자가 먹이를 앞에 놓고 으르렁거리며 표효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것처럼,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그 앞에 서서, 영적 허기에 잠긴 영혼이 사자가 먹이를 놓고 으르렁거리며 표효하듯 말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 모든 것에는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그냥> 예수님의 말씀 앞에, 그리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곁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것을 했고, 마르다는 그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마리아는 <그냥> 예수님 곁에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다는 말씀하시는 예수님 곁에 <그냥> 있지 못하고, 접대를 잘 할 염려로 <마냥> 바쁘고 분주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과 그냥 함께하는 현재>를 붙들었고, 마르다는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접대하는 일로 분주했던 마르다가 칭찬받는 것은 마땅합니다. 누군가를 섬기고 대접하는 일에 마음과 정성과 시간과 물질을 쏟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때와 장소가 중요합니다.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을 찾아 오신 <그 때>는 <접대하기 위해 염려하며 분주해야 할 때>가 아니라, <곁에 앉아 말씀에 경청할 할 때>였습니다. 그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맞이한 <그 때>는 <따스한 예수님 곁>을 <그냥 누려할 때>였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귀를 기울이고, 그 외 모든 것은 <염려하지도, 걱정하지도, 근심하지도 않아도 되는 그런 때> 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은 언뜻 그를 나무라시는 것으로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그를 <걱정과 근심, 그리고 염려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것>이었고, 그로 하여금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 현재>를 가장 만끽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묵상하는 복음서 말씀, 곧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는 제가 북부보스톤 신앙공동체를 만나며 처음 나누었던 묵상의 본문 중 하나였습니다. 그 때 제가 나누었던 메시지 기억하시지요? <사역은 언제나 사귐입니다> 였습니다. 그로부터 꽤 긴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 <사역과 사귐>은 어떤 관계로 자리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섬기는 사역 속에서 우리는 주님과 어떤 사귐을 나누어 왔습니까? 그리고 이웃을 섬기는 사역 속에 이웃과의 사귐, 그리고 주님과의 사귐이 어떻게 깊어져 왔습니까? 우리의 사역 속에서 주님과의 사귐이 바램처럼 깊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사귐>은 <한 사람의 현재>와 <또 다른 사람의 현재>의 만남입니다. 참되고, 깊은 사귐은 언제나 <한 사람의 현재>와 <또 다른 사람의 현재>의 만남인 것입니다. ‘한 사람의 현재’와 ‘다른 사람의 미래’가 만난다면, 그 만남에서 생기는 어긋남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를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 둘을 <만나고> 싶으셨습니다. 그들과의 만남 속에 <사귐의 깊이>를 더하고 싶으셨습니다.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그 사귐을 위한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예수님 발 곁에 <지금> 앉아, <다만, 그냥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반면 마르다는 그에게 말을 건네시며, 사귐의 자리로 초대하는 예수님을 대접해야 한다는 근심과 염려로 분주하여, 자신의 <지금/현재>를 걱정과 염려에 희생시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근심가운데 분주히 수고하고 있는, 그래서 <잠시 후> 마련하고자 애쓰는 그 <접대의 식탁>에서 예수님을 만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는 <지금> 예수님 곁에 앉아 있지 않았고, <지금>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지금>과 마르다의 <지금>이 어긋나고 만 것입니다. 말하자면, 마르다는 지금 예수님과 같은 강물에 발을 내딛고 있었지만, 그의 걸음걸이와 예수님의 걸음걸이는 같지 않았고, 그래서, 그 둘은 함께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르다를 어쩌면 마리아의 자리로 이끌어 가고 싶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현재와 마르다의 현재가 한 자리에 만나서, 사귐의 깊이가 더해지고, 들음의 깊이가 더해지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시간을 보낼 때 뜻 깊고 의미있는 시간을 보낼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  Quality Time 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한 공간에 누군가와 함께 있다고 그 사람과 Quality Time을 보낸 것은 아닙니다. 그 함께 있음이 <양질의 만남>이어야 우리는 그 만남 속에서 Quality Time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빠가 아이와 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할 때, 아빠는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아이는 태블릿 컴퓨터로 영상을 보며 한 시간을 보낸다면, 그 것은 아빠와 아이 모두에게 Quality Time이 될 수 없습니다. 양적으로는 한 시간을 보냈지만, 질적으로는 그 한 시간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되과, 깊은 <사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현재>와 아빠의 <현재>가 서로 만나지 못했고, 한 공간에 있었으나, 다른 공간에 서로 있었던 것과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 오셔서, 제자가 될 것을 소망하셨고,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을 기꺼이 따라 나섰습니다. 그리고, 이 제자의 길, 곧 제자의 삶은 늘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현재>와 <예수님을 마중하는 우리의 현재>가 만나는 자리에서 가장 진실되게 형성됩니다. 여러분, 우리와 사귐을 위해 사역의 길로 초대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지금 부르시며, 그 발 곁에 앉아 우리 귓가에 들려 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을 소망하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 곁에 주님을 의지하고 기대어 앉아, 우리 귓가에 들려 오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참된 만남과 사귐의 신비를 경험하는 주님과의 Quality Time을 누리길 기원합니다. 사역은 언제나 사귐이기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지금>을 향해 찾아오셔서, 사귐을 청하시는 주님의 초대를 받아 들이며, <주님의 현재>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을 걸면, 말을 거시는 주님께 <그냥>, 그리고 <마냥> 귀를 먼저 기울이면 됩니다. 말을 건네시는 주님을 대접하는 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사귐의 감격을 누리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깊어진 사귐의 자리로부터 우리의 할 일을 일러 주실 것입니다. 주님과의 사귐에 기초하지 않은 주님을 위한 사역 보다는, 주님과의 사귐의 기쁨, 그리고 감격에 뿌리를 둔 사역으로 <세상의 현재>와 <지구의 지금>을 변혁시키며, 하나님 나라의 큰 문을 열어가는 우리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아멘.


헌금 & 찬양

235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다같이

Offerings & Offertory Music 

(** 마지막 절은 일어서서)


+감사와 봉헌의 기도 Prayer of Thanksgiving

기도인도: 최진용 목사


+결단찬양Closing Hymn

399장 주의 약속하신 말씀 위에 서


+축도 Benediction

최진용 목사

+가능하신 분만 일어서서  Please stand, as you are able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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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이 시기에 우리 교회가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그 사역을 감당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함께 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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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은행을 통해 직접 Transfer하는 방법

2.헌금을 교회에 직접 보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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