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시간: 오전 9시 30분
예배 인도: 이동익 장로
전주 Prelude
예배로의초대 Call to Worship
찬양 Praises
낮은 자의 하나님

주를 위한 이곳에

조용한기도 Invocation
<이웃이 되어 주는 삶>을 묵상하며, 조용히 기도합니다.
Pray silently contemplating the way of life to be a neighbor.
찬송 Hymn
488장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대표기도 Congregational Prayer
윤선희 권사
+성경봉독 Scripture Lesson
누가복음 10:25-37
이정수 집사
Luke 10:25-37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2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27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2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29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31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2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3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34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35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말씀 Sermon
“이웃이되어주는사람”
최진용목사
“To Be a Neighbor”
<설교문>
우리 삶의 중심에 든든한 기둥으로 서 계신 하나님께서 은총과 사랑 가운데 여러분 삶에 힘과 능력으로 역사하시길 기원합니다.
여름 햇살이 뜨겁게 쏟아지고, 녹음이 우거진 7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몇주 전 야외예배를 드릴 때, 기온이 꽤 높이 올라갔습니다. 90 도가 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초여름인데, 기온으로는 한여름의 분위기를 느꼈던, 그런 날이었습니다. 다행이었던 것은 야외예배 장소에 제법 넓게 형성된 <나무 그늘>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날씨가 많이 더웠음에도 불구하고, <나무 그늘> 아래 모여 있었기 때문에, 예배 드리고,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큰 어려움 없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이야기를 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나무 그늘>이 꼭 우리 삶을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같이 느껴진 그런 하루였습니다. <나무 그늘>이 그 자리에 없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세 시간 넘게 함께 했던 그 시간이 전혀 다르게 경험되었을 것입니다. <여름 나무>는 일년 중 가장 넓은 그늘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 모두 <여름 나무>가 만들어 주는 넓은 그늘을 만끽하며,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동산에서 창조의 은혜와 손길을 느낄 수 있었던,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었던 <여름 나무>처럼, 우리 삶에서 서로 서로에게, 그리고 세상과 사람 위에 시원한 <생명의 그늘>을 만들어 주며,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신앙>은 “삶의 길 (the way of life)”이요, “삶을 위한 규범 (the pattern for living)” 입니다. 실제의 삶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신앙은 살아있지 않은 신앙이요, 우리 삶의 일상에서 영향을 행사하지 못하는 신앙은 형식의 옷만을 입은 신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끊임없이 갱신되고, 우리의 믿음의 현주소를 점검해 주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훈련과 배움을 얻게 해 주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 또한, 우리 삶의 한 가운데에서 삶으로 번역되지 못하면, 그 예배는 살아 숨쉬는 예배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예언자>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유대교 랍비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이 말합니다. “예배와 삶은 서로 분리된 두 영역이 아니다. 삶이 곧 예배가 드려지는 또 하나의 자리가 되지 못하면, 우리의 예배에는 <삶>이라는 중요한 요소가 결핍되고 만다. 종교는 특별한 절기 때만 지켜지는 페스티발 같은 것이 아니다… 종교적인 삶에 있어 중요한 것은 드물게 찾아오는 절정(climax) 의 순간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절정의 영적 경험이 어떻게 우리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 영향을 주는가에 있다. 율법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문법(the grammar of living)을 얻게하여, 우리 삶에 맞닥뜨리는 여러 관계들과 우리가 행해야 하는 여러 역할들을 감당하도록 돕는데 있다.”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 <Thunder in the Soul>, 78) 이 아침,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고, 찬양하고, 영적 교제를 나누는 우리가 함께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영적 지혜를 담고 있는 문구입니다. <삶>에서 분리된 <예배>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예배는 우리에게 <삶의 문법>을 가르쳐 주며, 우리로 하여금 무엇에 마음을 쏟고 살아야 할지, 무엇에 저항하며 세상 안에서 싸워야 할지, 그리고, 누구를 끌어안고 세상길을 함께 가야 할지 안내해 줍니다. 우리에게 예배 가운데 찾아오는 영적 경험과 분별과 지혜는 우리 삶의 자리에서 삶을 안내하는 실제적인 힘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의 예배, 그리고 믿음의 경험은 삶의 일상과 융합되지 못한 채, 형식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의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누가복음 10:25-37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잘 알려진 말씀, 그리고 우리가 많이 묵상해 온 말씀은 <오래된 길>과 같습니다. <오래된 길>을 다시 걸을 때 필요한 것 중 하나는, 우리의 기억 속에 저장된 경험은 경험대로 누리는 한편, 우리의 시야에 새롭게 들어오는 것들에 대한 <감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오래된 길에는 늘 아직 눈길이 닿지 않았던 ‘숨겨진 자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걷는 이 “오래된 길” 위에서 우리 모두에게 신선한 배움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어느날,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배움을 얻고, 삶의 고민들을 감당할 지혜와 분별을 얻고,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와 구원의 길을 묻고자 왔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이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의 물음은 예수님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의 질문과 연장선 위에 있었습니다. 그의 질문이 그 나름대로, ‘의미있는 질문’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마음에 ‘꽂혀있는 그릇된 의도’에 있었습니다. 그는 순수한 배움이나 교훈을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불순한 동기가 송곳처럼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예수님께 물음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그의 질문은 바른 질문이었지만, 그의 속마음은 삐뚤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불순한 마음을 지니고 묻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담담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율법에 정통했을 그에게 예수님의 질문은 답하기 수월한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신명기 6장 5절에 나와있는 말씀으로 예수님께 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그는 옳은 답을 갖고 지금껏 살아온 성실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응답할 만큼 율법의 중요성을 늘 인지하고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행함>의 중요성을 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아무리 율법의 조항이 바르고 선명하게 마음에 기록되어 있더라도, 그 율법의 조항이 삶으로 번역되지 않으면 그것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교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교사의 어리석음을 마주하게 됩니다. 평생을 율법을 연구하며 살아온 율법교사는 진리를 가르쳐 줄 참된 스승 앞에서, <시험하는 마음>을 앞세우며 질문을 던지는 우둔한 행동을 합니다. 우리는 지금 진리의 문 앞에서 어둠을 붙들고 있는 어리석은 한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그는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 기록된 율법의 조항을 따라 지금껏 살아왔음에도, 그 율법이 실제의 삶을 뚫고 힘을 발휘하는 경험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이런 모습을 숨기고,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누가복음은 율법교사가 순수한 의도로 질문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질문했다고 전합니다. 질문을 하는 율법교사의 의도가 순수하지 않았음을 복음서 기자 누가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의 중요성을 머리로 이해하더라도, 행함이 결핍되면 참 의미가 없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적잖이 당황했던 율법교사는, 이제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그려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또 다른 질문을 한 것입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주십니다. 우리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고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한 강도만난 사람이 길 위에 옷이 벗겨진채 매를 맞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마침 그의 곁을 어떤 제사장이 지나갔지만 그는 강도만난 사람을 발견하자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레위 사람도, 제사장과 같이, 그 사람 곁을 지나갔지만, 그를 발견하자 그를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만난 사람을 발견하자, 그는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측은히 여기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의 선한 행동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다음 날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는 다음 날,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며, 그를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하고,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갚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 주시며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지금 율법교사에게 자신의 질문을 변경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율법교사는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도전하듯> 예수님께 물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고 물으시며, 율법교사의 관심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에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며, 자신이 가졌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 예수님께서 던지신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예수님 앞에 서 있게 됩니다.
이 답을 얻은 후, 그의 인생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복음서는 그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라고 말씀하시며, 다시 한번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적어도 그의 마음에 새로운 질문이 자리잡았을 것은 분명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예수님께서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라는 질문으로 수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 속에 어떤 울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 이야기 속에 우리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비추어 본다면, 예수님의 질문은 곧 우리를 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여기서 강도만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유대사회의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종교적으로부정하고 열등한 그룹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회, 종교적 상황을 고려할 때, 예수님께서 들려 주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이 선하게 그려지는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유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만난 사람을 극진하게 보살피고 돕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발견하고 허겁지겁 그를 피하여 도망쳤지만,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가진 것을 사용하여 길 위에서 만난 낯선 사람을 성심성의껏 도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이웃이 되어 주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에게 강도만난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은 그에게 <낯선 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는 <타자>였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에게 <환대의 자리>를 마련해 주며, 그에게 다가서기를 꺼리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다만, <죽음의 위기를 겪고 있는 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의 위기를 맞이한 사람이 <생명의 숨결>을 되찾을 수 있도록, 그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열어 가시며, 살아가셨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열어 가는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을 지나치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만나서 치유의 은혜를 베푸신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다양한 질병들로 인해 고통과 아픔을 겪고 있었습니다. ‘열병, 문둥병, 중풍병, 오그라든 손, 굽은 등, 혈루증, 귀먹음, 벙어리 증세, 앞 못 봄, 수전증, 잘려 나간 귀, 죽을병’… 이러한 특별한 상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들 삶의 길 위에서> 만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치유의 사랑과 은총, 그리고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말>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손이 오그라진 한 사람에게 <손을 펴라!>로 말씀하시니, 그의 손이 펴졌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사람들은 예수님의 <접촉>을 통해 고침을 받았습니다. 문둥병자들이 예수님께서 몸에 손을 대신 후, 문둥병이 그들에게서 떠나는 경험을 했고, 귀먹은 사람의 귀에 예수님의 손이 닿자 그의 귀가 열렸습니다. (참고: 마커스 보그, <예수, 새로운 비전>, 98-99) 예수님께서는 질병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푸심과 동시에, 그들에게 <환대의 자리>를 열어 주시며, 그들의 삶에 <좋은 이웃/선한 이웃>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사셨던 예수님께서, <누가 내 이웃입니까?> 묻던 율법학자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주시며,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아침, 율법학자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 함께 서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입니까?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가 누구인지 따지지 않고, 다만 생명의 위기에서 일어설 계단을 놓아준 사람입니다. 누가복음에는 강도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나와있지 않지만, 그 사람이 유대인이었을 것이라는 점이 성서학자들의 공통적인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강도만난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의 만남은 <서로 반목하고 있던 두 세계의 만남>이었습니다. 서로 <접촉>을 꺼리던 두 세계에 속하던 사람이, <이웃이 필요한 사람>과 <이웃이 되어 준 사람>으로 만나서, <환대와 돌봄과 사랑의 접촉>을 나누며,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열어 가게 된 것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아름다운 내일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어떤 삶이 길 잃고 쓰러져 있는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는 삶>이고, 누가 상처입고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는 사람>인지가, 이 아침 분명해졌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걷는 제자의 길 위에서, <이웃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참되고, 선하고, 따뜻한 이웃이 되어 주는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웃이 되어 주는 사람>은 <타인과의 거리를 끊임없이 좁혀가며 살아가는 사람>임을 잊지 말고, 길 위의 사람들에게 참된 이웃과 벗이 되어 주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 마음 깊이 새기며, 세상 가운데 사랑의 빛을 밝히며, 우리 모두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아멘.
헌금 & 찬양
369장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다같이

Offerings & Offertory Music
(** 마지막 절은 일어서서)
+감사와봉헌의기도
Prayer of Thanksgiving
기도인도: 최진용 목사
+결단찬양Closing Hymn
279장 주 하나님의 사랑은

+축도 Benediction
최진용 목사
+가능하신 분만 일어서서 Please stand, as you are 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