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예배 시간: 오전 9시 30분

예배 인도: 김복경 장로

전주 Prelude

예배로의 초대 Call to Worship


찬양 Praises

주는 평화

은혜


조용한 기도 Invocation

<제자로서의 삶>을 묵상하며, 조용히 기도합니다.

Pray silently contemplating the life of Christ’s discipleship.


찬송 Hymn

483장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대표기도 Congregational Prayer

강시점 권사


+성경봉독 Scripture Lesson

누가복음 10:1-11

윤은주 집사

Luke 10:1-11

새번역 누가복음 10:1-11

1 이 일이 있은 뒤에, 주님께서는 다른 일흔[두] 사람을 세우셔서, 친히 가려고 하시는 모든 고을과 모든 곳으로 둘씩 [둘씩] 앞서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4 전대도 자루도 신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아라.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거기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내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너희는 한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거기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지 말아라.

8 어느 고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에게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리고 거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10 그러나 어느 고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든, 그 고을 거리로 나가서 말하기를,

11‘우리 발에 묻은 너희 고을의 먼지를 너희에게 떨어버린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아라’ 하여라.


말씀 Sermon

“평화를 심는 일꾼들”

최진용 목사

“Those Who Plant the Spirit of Peace”

<설교문>

은혜와 자비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도우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이제 본격적으로 <여름>의 정원에 들어선 여러분 모두 위에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늘 움직입니다. 마치 연주를 한참 진행중인 오케스트라처럼,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은 각자의 소리를 내고, 각자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며, <세상>이라는 큰 무대를 수놓고 있습니다. 그 세상을 구성하며,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 중에 <식물Plant>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식물>이 계절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제일 먼저>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저런 모습으로 만들어지는 생명의 에너지에 제일 먼저 반응하여, 또 다른 생명의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전달하는 것이 바로 <식물의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식탁 문화에는, 겨울을 지내고 나는 <봄나물> 곧, 냉이, 달래, 쑥 같은 나물들로 봄 밥상을 차려내며, 겨울을 지내며 지친 우리 몸에 기운을 북돋는 식문화가 자리잡아 온 것이겠지요?

겨울을 지내고 봄을 맞이한 들판에 <풀>이 없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나무>에 푸른잎이 돋아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들의 식물에 <꽃>이 피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상상만 해도 우리 가슴이 철렁 내려 않는 일이 아닌가요? 식물은 다른 생명체에 <생명의 에너지>를 전달해 주며, 이 세상이 생명의 기운을 머금고 움직일 수 있도록 일하는 참 고마운 것입니다. 독립 기념일을 맞이한 이번 주말, ‘들의 풀’과 ‘숲의 나무,’ 그리고 ‘식물과 나무에 핀 꽃들’을 응시하며, 여름 산책을 하는 것도, 생명의 기운을 깊이 누리며, 휴일을 맞이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함께 살아가기>를 좋아하셨고, <함께 일하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적인 권능을 지니고 이 땅에 오셨지만, 한 사람의 <사람>이기를 늘 즐거워하시며, 사람들과 어우러져 삶의 이야기 꽃을 피워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모으신 열 두 명의 제자들은, 바로 그러한 <함께 살아가기>와 <함께 일하기>를 즐겨 하셨던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열어 가시며, 그 곁에 소중히 가꾸어 가신 <복음과 사랑과 평화의 일꾼들>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맨 처음 모으셨던 <제자들의 길>을 정성스럽게 닦아 주시며, 인내와 사랑과 기다림, 그리고 용서 가운데, 그들의 <제자로서의 삶>을 성장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함께 살아가기>와 <함께 일하기>를 기뻐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 열 두명의 제자들만을 <제자의 삶과 소명>으로 다듬고 가꾸어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과 사랑과 평화의 씨앗을 뿌리고, 경작할 <복음의 일꾼들>을 소망하셨기 때문에, 복음과 평화와 사랑의 씨앗을 예수님과 함께 뿌릴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을 찾고 계셨습니다.

오늘 묵상하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파송하신 이후, <다른 일흔[두]> 사람을 세우셔서, 그들을 제자로 보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신 ‘다른 제자들’의 숫자가 ‘일흔’ 혹은 ‘일흔 둘’로 기록된 것은 성서를 기록한 사본에 따라 기록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로 된 창세기 10장은 세계에 모두 70민족이 있다고 여겼지만, 히브리 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은 모든 민족을 72민족으로 서술했습니다. 하지만, 70민족이나, 72민족이나, 창세기 10장에 등장하는 <모든 민족/나라>를 의미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세우신 열 두 제자 외의 <다른 사람들/제자들>은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를 포괄하여 선교를 하게 되는 초대 교회 선교의 전조가 되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제자들을 세우시며 장차 그들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을, 제자를 파송하는 초기 단계에서 부터 소망하고 계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바램 속에서 제자들을 <친히 가려고 하시는 모든 고을과 모든 곳> 으로 보내셨습니다.

  • 둘씩 짝을 지어 가는 길

흥미로운 것은 제자들을 혼자가 아닌,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둘씩> 짝을 지어 제자들을 보내신 것은 서로 서로 의지하며 선교의 길을 가라는 뜻일 것입니다. 지난 주일 우리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를 묵상하며 <서로의 짐을 서로 서로 져 주며 믿음의 길을 함께 걸어가라>는 권면에서 느꼈듯,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길은 홀로 걸어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것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것’(눅 9:62)이고, 신중하고 단단한 결단과 결심을 지니고 걸어가야 하는 길이기에, 서로 서로 격려하고 도우며, 혼자가 아닌, 함께 가야 하는 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가고자 하셨던 모든 곳’으로 사람들을 보내시며, 둘씩 둘씩 짝을 지어 걷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가거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은 ‘구원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세상>이라는 <들>로 보내지는 ‘영적 농부들’입니다. 그런데, 추수를 위해 펼쳐진 들판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이리>와 같은 <악한 세력>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사명을 얻고 보냄을 받은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들판에 보내지는 <양 떼>와 같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양 떼는 스스로는 힘이 없고 약하지만 목자의 인도를 받는 가운데, 그 갈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혼자가 아닌 둘씩 짝을 지어가며, 스스로의 힘과 능력이 아닌 예수님의 능력과 힘에 기대어, 하나님 나라를 열어 가는 것이 <예수님께 보냄을 받은 제자들이 걸어가는 삶의 길>인 것입니다.

  • 가볍게 여행하기

이렇게 둘씩 짝을 지어 제자들을 ‘가고자 하셨던 모든 고을’로 보내시며, 예수님께서는 <가볍게 여행할 것>을 명하십니다. ‘전대도 자루도 신도 가지고 가지 말고’ 다만 <하나님 나라의 복음> 만을 지니고 여행할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몸을 가볍게 하고 길 위를 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이 세상에 깊고 단단히 뿌리내리는 길이 아닌, 세상을 활주로 삼아 하나님 나라로 날아 오르는 길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의 부피가 많아지면 삶의 여러 가능성을 대비하는 능력이 증가하고,  삶을 요령있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살아내는 능력이 확장될 것 같지만, 많은 경우 가진 것의 무게는 부자유하고 속박된 삶과 비례합니다. 지닌 것이 많을 수록 욕심은 늘고, 삶의 민첩성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닌 것을 최소화하고 길을 나설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가볍게 여행할 것을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만나는 이들에게 전할 인사를 알려 주십니다. 바로 <평화의 인사>입니다. 평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샬롬’은 단지 고요함이나 정적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온전함>과 <완전케 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전하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세상과 사람을 <온전함>과 <완전케 됨>의 길로 인도하는 “거룩한 사역”의 길에 헌신하라는 뜻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전하는 평화의 인사가 거절당하는 경우도 있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전한다해도, 그 <선물>의 의미와 가치를 상대방이 알지 못하면 그 선물은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기쁨을 그에게 강요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선물을 전하는 사람의 ‘바른 자세’를 끝까지 지키며, 겸손과 온유의 손길로 갈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라는 것이 불확실함을 뚫고 나아가야 하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당부였던 것입니다.

  • 모험의 길, 제자의 길

사랑하는 여러분, <제자의 길>은 <모험의 길>입니다. ‘모험’은 불확실함을 무릅쓰는 것을 의미하기에, ‘제자의 길’은 ‘모험의 길’과 같이, 불확실함을 무릅쓰고 지향점을 향해 나아가는 길입니다. 얼마전 세상을 떠난 영국 연방의 유대교 랍비 조나단 색스(Jonathan Sacks)는 <영성에 관한 연구: 매주 읽는 유대 성서/ Studies in Spirituality: A Weekly Reading of the Jewish Bible>라는 책에서 노아의 삶을 묵상하며, ‘믿음이란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라고 말합니다. 어느날 불현듯 찾아오셔서 살아가던 삶의 자리를 접고, 방주를 만들라는 뜻밖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던 노아의 믿음은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였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위해서 혹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위험을 감수할 용기를 갖는 것이다. 위험(harards)이 그 길에 나타날 것을 알면서도 먼 길을 떠나는 용기가 바로 믿음이다. 용기를 갖고 떠난 그 길에서 믿음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실 것임과,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의지를 계속 조율하면 하나님께서 늘 힘을 주실 것임을 알게 해 준다. 믿음은 확실함에 관한 것이 아니라, 불확실함과 동행하며 살아갈 용기가 과연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Jonathan Sacks, Studies in Spirituality: A Weekly Reading of the Jewish Bible, 12)

우리가 묵상하는 누가복음 10장에 등장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여러 고을로 보내시는 장면 또한,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에 관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닌 것을 최소화>하고, <가볍게 여행하기>를 실행하며, 그들이 알지 못하던 <고을>로 가야 했습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던 <낯선 사람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전하고, 병자들을 돌보고, 하나님 나라가 세상의 문턱에 가까이 왔음을 알려 주는 것이 예수님께 보내심을 받은 제자들이 걸어야 했던 삶의 길이었습니다. 이 길은 <불확실함을 무릅쓰고> 걸음을 내딛는 삶의 길이었고, 거절 당할 것도 감수해야 하는 거친 삶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삶은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모험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불확실함과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고, 모험 속에서 평화의 인사를 전하며, 그 인사가 거절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묵묵히 평화를 심는 사람들이 되는 길입니다.

이 모험의 길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어느 고을에 들어가든지, 사람들이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든, 그 고을 거리로 나가서 말하기를, ‘우리 발에 묻은 너희 고을의 먼지를 너희에게 떨어버린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아라’ 하여라.” 병자를 고쳐주고,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음을 누군가에게 알려 주는 <귀한 일>을 ‘성심 성의껏’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 마음을 거절하고, 진심을 담아 전하는 환대와 위로와 교훈에서 등을 돌릴 수 있음을 알려 주시며, 예수님께서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다만 묵묵히 전해야 하는 <말씀과 은혜와 구원의 선물>이 있음을 제자들이 짐작할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모험의 길>을 닮은 <제자의 길>은 <불확실함>을 무릅쓰고,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지만, 세상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그 거룩하고 위대한 발자국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평화를 심기 위한 발걸음에 장애물이 등장하더라도, 상심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다만 해야 할 일들을 묵묵히 완수하며,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 평화를 심는 먼 길을 걸으며

여러분, 평화를 심는 삶의 길은 <먼 길>입니다. 평화를 심는 길은 나무를 심는 것과 비슷합니다. 나무는 짧은 시간에 쉽게 자라지 않습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자라고, 여러 계절을 수없이 통과하며 그 부피와 모양이 커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무의 성장이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나무의 성장으로 인한 유익은 그 나무를 심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나무를 심는 것은 누군가의 삶에 <내일>과 <미래>를 만들어 주는 행위입니다.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은 누군가의 삶을 <불확실하고 두려운 내일과 미래>로부터 지켜주는 행위입니다. 평화를 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며 <평화를 심는 사람들>이 될 것을 명하셨고, 그 길이 고단하고, 저항과 거절을 경험하는 험난한 길임을 또한 잘 아셨습니다. 하지만, <평화를 심는 삶>은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거대한 발자국을 향해 있습니다. 비록 시간을 필요로 하는 <나무 심기>와 같은 일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저항을 뚫고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평화를 심는 삶>으로 부름 받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향해 가까이 다가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묵묵히, 그리고 두려움 없이 증거하며, <모험과 같은 제자의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작가 장 지오노가 실화를 바탕으로 1953년 발표한 동화 <나무를 심은 사람>에는 엘제아르 부피에라는 양치기 노인이 등장합니다. 동화는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전쟁이 한창이던 때, 양치기 노인은 평야지대에서 농장을 하던 사람이었지만 아들과 아내를 모두 잃고 알프스 고산지대의 외딴 곳으로 삶을 옮겼습니다. 그곳은 나무를 베어 숯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분별없는 욕망으로 땅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린 곳이엇습니다. 노인은 양을 치면서 그곳에 하루에 100개씩 도토리를 심었습니다. 그렇게 3년 동안 심은 도토리가 10만 개였습니다. 도토리와 함께 노인은 황폐한 땅에 여러 나무를 심었습니다. 너도밤나무, 떡갈나무, 자작나무, 등등… 노인은 나무를 심는 일을 한참의 시간 동안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묵묵하고 꾸준하게 이어갔고, 인간의 과도한 욕망에 의해 황폐해졌던 땅은 그 긴 시간을 거쳐서, 아름다운 숲으로 바뀌었습니다. 나무가 사라져 늘 세찬 바람이 불던 그 곳에는 어느덧 나무 사이로 산들바람이 불어 오게 되었고, 메말랐던 계곡에는 다시 맑은 물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땅이 황폐해져 그 곳을 떠났던 사람들은 다시 돌아오게 되었고, 마을에는 아들의 웃음소리가 햇빛처럼 빛나게 되었습니다. 이 거대한 변화가 <한 사람>의 묵묵한 <나무 심기와 나무 가꾸기>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전쟁 가운데 휩싸여 있었고, 사람들이 살던 땅은 황량한 폐허로 바뀐 곳에서 양치기 노인 엘제아르 부피에는 조용하고, 묵묵하고, 꾸준하게 <나무를 심고 있었고>, 그의 나무 심기는 다름 아닌 <평화를 심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우리는 <평화를 심는 일꾼들>입니다. 그리고, 평화를 심는 삶은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과 같아서, 오랜 시간 동안 인내와 꾸준함, 애정과 성실함, 그리고 소망과 용기를 필요로 하는 삶입니다. 황폐한 땅에 평생 나무를 심은 양치기 노인의 수고를 통해, 그 땅이 아름다운 숲과 계곡으로 변화되었듯, 우리가 지금 심고 있는 평화의 씨앗, 우리가 지금 가꾸고 있는 평화의 나무들이 언제가 세상을 아름답고 빛나게 수놓을 것을 믿고, 소망하며, 우리 모두 <평화를 심는 오늘의 수고>에 마음과 정성을 담아내기를 기원합니다. <평화를 심는 일꾼들>로 부름받아, <제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두려움을 이길 용기와 믿음, 저항에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소명 의식을 마음 속에 새겨 넣고,  <모험과 같은 제자의 삶>을 성실히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아멘.


헌금 & 찬양

513장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 차도

다같이


Offerings & Offertory Music

(** 마지막 절은 일어서서)

+감사와 봉헌의 기도   Prayer of Thanksgiving

 기도인도: 최진용 목사


+결단찬양Closing Hymn

493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축도 Benediction

최진용 목사

+가능하신 분만 일어서서  Please stand, as you are able

환영합니다
공동체와양육
예배와말씀
알립니다

How can We help?

음성으로 알려드리는 교회소식입니다

헌금안내

힘든 이 시기에 우리 교회가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그 사역을 감당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함께 해 주시기 바랍니다.

헌금방법은 현재로서 3가지입니다

1.은행을 통해 직접 Transfer하는 방법

2.헌금을 교회에 직접 보내는 방법

3.Bank of America를 통해 Online Transfer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