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시간: 오전 9시 30분
예배 인도: 이동익 장로
전주 Prelude
예배로의 초대 Call to Worship
찬양 Praises
예수 나의 첫 사랑 되시네

주님께서 주시는 그 사랑으로

조용한 기도 Invocation
<서로 사랑하여라>는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조용히 기도합니다.
Pray silently contemplating the word of Jesus, “Love one another.”
찬송 Hymn 31장 영광의 왕께 다 경배하며

대표기도 Congregational Prayer 정대훈 권사
+성경봉독 Scripture Lesson 요한복음 13:31-35 이정애 집사
John 13:31-35
-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렇게 하실 것이다.
- 어린 자녀들아, 아직 잠시 동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유대 사람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나는 너희에게도 말하여 둔다.
-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말씀 Sermon “내가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최진용 목사
“Love One Another, As I Love You”
<설교문>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자비로움과 사랑으로 여러분 삶을 늘 보살펴 주시길 기원합니다.
봄의 한 중앙에 서 있는 줄 알았는데 여름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는듯한 <더위>가 찾아온 한 주였습니다. 더위가 찾아 왔음에도, <봄의 표정>을 한껏 담은 숲과 나무와 들과 산, 그리고 강물이 우리를 <봄의 맑고 따듯한 정원>으로 안내해 주는듯한 따사로운 한 주였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꽃과 연두빛 나뭇잎, 그리고 따사로운 봄햇살 속에 우리의 생명의 호흡이 깊어지고, 삶의 표정이 밝아지고, 삶을 향한 소원과 소망이 샘솟는 시간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길 기원합니다.
사순절 후 맞이했던 부활절 아침이 지난 후 한달 정도 지나고 있습니다. 부활주일 이후 시작되는 <부활절 시즌>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성령강림주일인 6월 첫주까지 중요한 ‘영적 훈련’ 혹은 ‘영적 여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누구이신지, 어떤 삶을 사셨는지, 그리고 어떤 죽음을 거쳐, 어떻게 부활의 기쁨을 우리 앞에 선포하셨는지를 반복적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 <반복>과 <심화>의 과정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구원자> 가 되시고, 어떤 <삶의 열매>를 우리 가운데 맺어 주셨는지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2022년 <부활의 계절>이 아름다운 <믿음의 꽃>을 피우고, <싱그러운 생명의 잎>을 맺는 보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누구이신가요? 이 질문에 좋은 대답이 될만한 시 한편을 소개합니다. 목사이기도 한 시인 용혜원의 <시인 예수>라는 시입니다.
사나이 중의 사나이/ 예수 그리스도 혁명가도/ 철학자도/ 교육자도 아닌 사나이 한 순간쯤 되는 삶을/ 영원한 삶으로/ 열어준 멋진 사나이 하늘을 나는/ 새를 노래하고/ 들에 핀 백합화를 노래한/ 시인 예수 무엇 하나/ 소유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무엇 하나/ 남기려 하지 않았다 사랑으로 사랑을 살다가/ 영원한 사랑으로/ 함께하는 사나이 온 세상을 사랑하며/ 온 세상을 노래하며/ 온 세상을 감싸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붉은 보혈의 꽃으로활짝 피었다시처럼 살다가 부활한/ 영원한 예수/ 시인 예수 사나이 중의 사나이/ 나를 사로잡는 시인 예수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해 볼 만한 표현이 참 많은 시입니다. ‘한 순간쯤 되는 삶을 영원한 삶으로 열어준 멋진 사나이’라는 시인의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주신 구원과 생명의 은혜를 ‘멋지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짧은 인생을 사셨습니다. 30대 초반의 청년의 삶을 사시다가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맞으셨으니, 참 짧은 인생의 시계를 지니고 이 땅을 사신 셈입니다. 그런데 그 <한 순간쯤 되는 짧은 삶> 을 치열하고, 성실하게 사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삶>이라는 <멋진 선물>을 우리 생명 향해 쏟아 부어 주셨으니, 참으로 <멋진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살아가는 동안 <삶을 노래> 하고, <세상을 노래>한 <시인> 이셨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예수님께서 ‘하늘을 나는 새를 노래하고 들에 핀 백합화를 노래한 시인’이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시인 예수님>은 <삶과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는데 온 삶을 다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 위에서 예수님께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을 소흘히 대하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다급한 삶의 상황에서 급하게 도움의 손길을 찾는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을 지나치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찾아온 ‘오랜 동안 아픔과 질병과 좌절을 안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마지막 희망> 이 되어 주는 것에 진심을 다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사랑을 살아가 영원한 사랑으로 함께하는 사나이’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셨고>, <사랑의 삶을 살아가셨으며>, 우리를 <영원한 사랑의 그 깊고 넓은 품>으로 안아 주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께서 두 팔을 넓게 펴서 만들어 주신 사랑의 울타리를 벗어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어긋난 길을 걸을 때가 있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이와 같이, 용혜원 시인의 표현처럼 ‘시처럼 살다가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신 <시인 예수> 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오늘 이 아침, 우리는 복음서 말씀으로부터 <너희는 서로 서로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함께 듣게 되었습니다. 에수님의 말씀하시는 말투에서 느끼듯, <서로 사랑하여라> 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하나의 중요한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여러 조항으로 되어 있는 <율법/계명> 을 <서로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으로 통합시키는 예수님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것>이 왜 <새로운 계명>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것일까요? 사랑은 이미 우리 가운데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고,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사랑하는 것>을 멈춘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사랑>이라는 세상의 큰 움직임 <밖>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행하고 있는 <사랑>이 <계명>이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여라>는 명령 다음에 우리에게 들려 주신 말씀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는 이미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가 주고 받으며 살아가는 사랑을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사랑>이라 믿고 행해왔던 것에 대해 주의깊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서로 사랑하여라>는 오늘의 말씀으로부터 들려오는 예수님의 ‘명령’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는 컨텍스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는 말씀을 계명으로 주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신 다음, 제자들의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을 정성스럽게 씻어 주셨습니다. 당시 관습으로, 누군가의 발을 씻기는 것은 스승이 제자에게 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런 상황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베드로는 발씻기를 사양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설득하시며, 한사코 그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모두 씻기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섬김과 사랑의 길>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로 주신 <서로 사랑하여라>는 계명은 바로 이러한 컨텍스트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가 늘 행해왔던 것이지만, ‘그 사랑의 정도’와 ‘그 사랑의 마음,’ 그리고 ‘그 사랑의 진실됨의 여부’에 있어서 우리는 얼마나 확신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 같이, 너희도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부끄럼 없이 설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계명/명령은 <새로운 계명>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행해왔으나, 우리 삶에서 깊이 있게 실행되지 못하고, 풍성하게 열매맺지 못한 <미완의 과제>이기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새로운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는 말씀하시는 장면의 <전>과 <후>에,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이 위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새 계명>으로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여라>는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셨습니다. 닮을 수 없을 것 같이 크고, 높고, 넓고, 깊은 예수님의 그 사랑 앞에서, 제자 중 <한 사람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할 음모에 가담하게 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된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바다를 항해하며 그 마음에는 <사랑> 대신 <어둡고 거짓된 욕망>이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묵상하는 복음서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실 때, 유다는 그 자리에 함께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배신하게 될 유다는 <내가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사랑하여라>는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새 계명을 접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께서 걷고 계셨고, 제자들에게 함께 걷자고 청하신 <사랑의 길>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슬프고, 마음 아픈 순간을 예고하신 후,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여라>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실 때,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이 말씀에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말씀을 듣고 난 후,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 13:36) 베드로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예수님께 ‘왜 지금은 따라갈 수 없는지’ 묻습니다. 그 물음과 함께 자신의 단호한 각오를 예수님께 전합니다. ‘저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확신에 차서 말하는 베드로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요한복음 13:38)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라도 바치겠다고 마음의 다짐을 하는 베드로… 그러나, 정작, 그는 후에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신은 주님을 배신하고, 주님께서는 오히려 그런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다는 것을… 하지만, 그 사실을 마음 깊이 깨닫게 되는 그 때, 베드로는 진정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때가 되어서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얼마만큼의 무게가 실려 있었는지 깨닫게 될 것이고, <그와 같이 서로 사랑하여라>는 <사랑에 관한 예수님의 명령> 이 <새로운 계명>이어야 했는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자매, 형제 여러분,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는 예수님께서 주신 이 <새 계명> 으로 우리 살아가는 세상을 <참 사랑>과 <진실된 사랑>으로 깊이 물들여 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는 늘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아왔지만, 그 어느 한 순간도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아오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늘 <사랑이라는 행위>의 주변을 서성거리고, 맴돌며 살아왔지만, 우리의 <사랑함>으로 세상의 온도를 훈훈하고, 따스하게 올리며 살아오지 못했습니다. ‘사랑한다’ 고 상투적으로 말하며 오히려 냉랭한 마음으로 세상을 냉각시켜왔고, ‘사랑하기 위해 애쓴다’고 말하며 사실은 ‘사랑하는 그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아침 부활절 다섯째 주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오늘의 변혁을 통해 소망의 내일을 여는, <새롭고, 또 새로운 계명>입니다.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며 사는데 있어, ‘이쯤이면 되겠지’ 혹은 ‘여기까지면 충분해’ 라는 자기 만족을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주님께서 <내가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라는 전제를 앞에 두고 <사랑하라> 명하시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처음에 인용한 용혜원 시인의 표현처럼, ‘사랑으로 사랑을 살다가 영원한 사랑으로 함께 하시는’ <생명과 사랑의 시인 예수님> 을 마음에 늘 새겨 넣고,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이 메마른 세상의 자리 자리 마다, 참 사랑과 진실된 사랑의 온기를 채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원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이 <오래된 새 계명>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아멘.
헌금 & 찬양 4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다같이

Offerings & Offertory Music
(** 마지막 절은 일어서서)
+감사와 봉헌의 기도 Prayer of Thanksgiving 기도인도: 최진용 목사
+결단찬양Closing Hymn 512장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축도 Benediction 최진용 목사
+가능하신 분만 일어서서 Please stand, as you are 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