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부터 화요일, 그리고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매일 각자의 자리에서 5분간 말씀을 묵상하고,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마칩니다
토요일 (5/20)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곧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며,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하였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보아라,]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밖으로] 베다니까지 데리고 가서,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시는 가운데, 그들에게서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께 경배하고, 크게 기뻐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날마다 성전에서 지냈다.(누가복음 24:44-52)
묵상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입니다. 세 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이지만, 그 울림의 깊이가 크기 때문에 한번 접하면 우리 마음 속에 깊이 남아 있는 그런 글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우리는 수많은 만남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만남 속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사랑의 경험’속에 행복을 누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사랑의 경험 속에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의 만남 속에서 <자세히> 보아야 하고, <오래> 보아야 합니다. 이 ‘자세히 봄’과 ‘오래 봄’ 없이는 아름다움도, 사랑도, 꽃 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행길>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늘 <자세히> 보셨고, <오래> 보셨습니다. 제자들의 삶을 자세히 보셨기 때문에 그들 삶의 그늘진 모습 까지도 끌어안는 선한 <폼>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혼란에 빠졌던 제자들이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떠났을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한결같이 그들의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모습으로 그들을 찾아 가셔서, 그들의 아름다움을 호명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늘 제자들을 스치듯 바라 보신 것이 아니라, <자세히> 보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오래> 보셨습니다. 제자들 하나 하나의 삶을 오래 보시며 그들 삶에 사랑의 시선이 뿌리 내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를 끝까지 사랑하셨던 것이 <오래 바라보며, 깊은 시선>으로 그들을 대하셨던 이유도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묵상하는 복음서 말씀은 하늘로부터 땅을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이제 땅으로부터 하늘로 올라가시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세히>, 그리고 <오래> 보며, 아름다움을 호명하고, 사랑의 경험 속에 잠기게 하신 제자들에게, 당신이 겪으신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상기시키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보아라,]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신비>의 <증인>이 되는 되는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들의 자격을 논하지 않고, 먼저 사명을 맡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되나요? 우리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신뢰, 바램과 소망, 자비와 포용을 깨닫게 됩니다. 늘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며> 제자들의 <전부>를 끌어 안고 사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제자들이 세상 가운데 힘써야 할 사명으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증인>이 되는 소명을 맡기십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맡기신 일을 제자들이 할 수 있도록 <위로부터 내려 오는 능력>을 입혀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달리 말하면, 제자들이 입게 될 성령의 권능에 대한 약속입니다. 오늘 이 아침, 하늘로부터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땅으로부터 하늘로 올라가시며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부터 소명을 얻는 자리에 우리 또한 함께 서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음성은 우리를 향한 음성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음성 속에서 어떤 부르심을 깨닫습니까? 우리 모두,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신실한 증인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기도
“자비와 은총의 주님, <땅의 삶>을 함께 걸으며 제자들과 동행하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세상 위에 남겨질 제자들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힘쓰셨던 일을 이어가고, 예수님께서 이루셨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신비를 전하는 증인과 전달자가 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바램 속에 <제자들>은 <사도들>이 되는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 주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 곧 그들이 실패했던 자리에 서서 기다리며, 마침내 위로부터 입혀지는 성령의 권능에 힘입어 사도들이 되었듯, 주님을 따르려 힘쓰는 우리 모두에게도 성령의 은사 속에 각자의 몫을 다하여 세상길 걸어갈 수 있도록, 늘 도와 주옵소서.”
금요일 (5/1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려는 것입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버지,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으로, 나를 아버지 앞에서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 나는,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택하셔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본래 아버지의 사람들인데, 아버지께서 그들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으며,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을 참으로 알았고,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위하여 빕니다. 나는 세상을 위하여 비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하여 빕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나의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모두 나의 것입니다. 나는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요한복음 17:1-11)
묵상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을 오늘 아침 묵상에서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향해 다가오는 운명의 시간을 짐작하고 계셨습니다. 그 운명의 시간에 이르렀을 때를 생각하시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제 <때가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는 다름 아닌, 아버지의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는 <죽음의 때>를 의미합니다. 세상의 시각에서 <죽음의 시간>은 <영광의 때>일 수 없으나, 예수님의 시각에서, <죽음의 시간>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을 때>입니다. 이 죽음의 때가 영광의 때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 죽음의 때는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때를 거쳐 장차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계획이었고, 바로 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그 순간이 아들이 영광의 때에 이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의 때에 예수님께서 마음을 두시는 것은 제자들의 <안위> 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어둠 속에 놓인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걱정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장차 예수님을 떠나 보내고 남겨질 세상은 진리를 거스르는 세상이고, 어둠에 잠겨 있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 홀로 남겨질 제자들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던 것은 자기를 비우심을 통해서였습니다. 사람을 위한 사랑과 구원의 선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신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해 아버지의 마음과 일치를 이루셨고, 그런 아들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영광되게 하셨습니다. 아들은 자기 비움을 통해 아버지의 뜻과 하나가 되셨고, 아버지는 아들을 영광으로 충만케 하심으로 아들의 헌신과 일치를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과 일치의 신비였고,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치의 신비로 제자들을 축복하려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이 아침, 아버지의 사랑에 제자들을 위탁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아침 깨닫는 예수님의 마음을 삶의 등불과 힘으로 삼으며, 일치를 위한 믿음의 모험을 감행하길 기원합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주님, 떠나시는 예수님께서 남겨질 제자들을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 <<떠남>>은 <비움>이지만 <완성>이었고, <슬픔>이지만 <기대>였습니다. 자기를 비우신 아들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비움을 채우시며 영광의 자리에 서게 하셨고, 슬픔 속에 제자들을 떠나가시지만 떠남의 슬픔을 일치에 대한 소망과 간절함으로 바꾸셨습니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비움의 사랑을 세상 가운데 연습하며 예수님과의 일치를 향한 소망과 믿음 가운데 살아가게 하옵소서.”
목요일 (5/18)
보아라,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 두고, 제각기 자기 집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벌써 왔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2-33)
묵상
예수님은 제자들과 <동행>하셨습니다. <동행한다는 것>은 ‘마음의 일치’를 이루며 함께 걷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며, 그들과 마음의 일치를 이루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묵상하는 복음서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동행의 리듬이 흔들릴 것을 예고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 두고, 제각기 자기 집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예수님 곁을 걷던 제자들이 <혼자> 예수님을 버려 두고, <제각기> 흔어져 갈 것을 예고하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얼마나 쓸쓸했을까요? 하지만 쓸쓸한 마음을 예수님께서 가지셨다고 해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던 그 마음에 변화가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외롭고 쓸쓸하셨겠지만, 그들의 연약함과 불완전함까지도 예수님께서는 끌어안고 포용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비록 제자들이 곁을 떠나 홀로 되시겠지만, 당신께서는 늘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고 강조하십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고통을 뛰어 넘게 하시지는 않으시겠지만, 아들이 겪을 고통의 시간 동안 그 아픔을 함께 겪어내실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입니다.
이 말씀과 함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 말씀은 비단 예수님 당시 그 곁을 걸었던 제자들만을 위한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 곁을 걷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혼자 버려두고 제각기 흩어졌던 제자들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 곁을 걷던 걸음에서 멀어져 예수님을 버려두고 딴 길로 갈 수 있습니다. 특히 그 걸음 앞에 장애물과 환난이 계단이 놓여진다면, 우리는 환난 앞에서 용기를 잃고 방황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끝까지 품어 주시며, 때로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제자의 길 위에서, 예수님의 포용과 용서의 사랑을 지팡이로 짚고 일어서라고 겪려 하십니다. 오늘 이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곁에 찾아오셔서, 삶의 길과 마음의 길을 인도하고 이끌어 주시는 주님의 넓은 가슴과 튼튼한 팔을 경험하길 기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구원의 주님, 제자들이 당신을 버려도 그 제자들이 자비와 용서의 사랑의 울타리 <밖>을 걸어가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키게 하옵소서. 환난을 당해도, 평화의 마음을 잃지 말라고 격려 하시며 <용기를 내어라>라고 말씀하시는, 인자하고 따뜻하신 예수님 곁을 한시도 벗어나지 않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수요일 (5/17)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의 대적자들, 나의 원수들, 저 악한 자들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다가왔다가 비틀거리며 넘어졌구나.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재난의 날이 오면, 주님의 초막 속에 나를 숨겨 주시고, 주님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감추시며, 반석 위에 나를 올려서 높여 주실 것이니, 그 때에 나는 나를 에워싼 저 원수들을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높이 치켜들겠다. 주님의 장막에서 환성을 올리며 제물을 바치고, 노래하며 주님을 찬양하겠다. (시편 27:1-6)
묵상
오늘 묵상하는 시편은 <다윗의 시>라고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다윗에 우리에게 알려주는 인생의 지혜요, 자신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 두려움은 우리 삶을 구성하는 피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두려움 없이 세상 살이에 임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두려움은 우리가 피하려 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두려움을 대하는 우리 마음의 자세입니다. 호랑이에게 붙들려 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무사할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두려움의 대상이 우리 앞을 가로막더라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의 자세요,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종종 쓰는 신앙 언어 중에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삶은 피할 수 없는 여러 문제들 앞에 서게 되지만, 어떤 문제보다도 하나님께서 크신 분임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문제 앞에서 무릎 꿇지 않고, 어깨를 펴고 문제를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이 나의 빛과 구원이시니, 누구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다윗이 이어서 말합니다. “나의 대적자들, 나의 원수들, 저 악한 자들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다가왔다가 비틀거리며 넘어졌구나.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다윗에게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만 의지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내 몸과 영혼과 마음을 의탁하고 맡긴다는 뜻입니다. 바람을 이용해서 항해하는 배들은 불어오는 바람에서 나아갈 힘을 얻고, 그 바람의 방향을 따라 나아갈 방향을 분별합니다. 바람의 힘이 없다면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 몸을 맡기고 사는 삶>도 이와 같습니다. 배가 바람에 몸을 맡기듯, 우리 또한 하나님께 몸을 맡기며 세상 살이에 임할 때, 우리는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심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룻길을 걸어가며, 하나님께 온전히 우리 마음과 삶과 영혼을 내어 맡기며,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기도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주님, 다윗의 시를 만나 주님께 의지하는 삶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두려움 없이 살아감도 불가능하고, 문제 없이 살아가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우리에게는 두려움을 물리치도록 도우시는 주님의 손길이 곁에 있고, 문제 보다 크신 하나님의 보살피시는 은혜가 삶의 곁에 있습니다, 주님, 두려움 속에 우왕좌왕하지 않도록 도와 주시고, 문제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도와 주옵소서. <주님만 의지하고 살아가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다윗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오늘 햐룻길을 믿음과 신뢰 속에 살아가게 하옵소서.”
화요일(5/16)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에 이르렀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8:16-20)
묵상
박노해 시인의 <도토리 두 알>이라는 재미있는 시가 있습니다. 이런 시입니다: “산길에서 주워든 도토리 두 알/ 한 알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 한 알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 나는 손바닥의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 내가 더 크고 더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 크고 윤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은/ 청설모나 멧돼지에게나 중요한 일/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 나는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숲으로 힘껏 던져주었다/ 울지 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우리는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욕망의 작용>에 연관되어 살아갑니다. 욕망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떤 욕망의 작용에 반응하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도토리 두 알을 보며 도토리의 욕망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두 알의 도토리를 보며, 한 알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이고, 다른 하나는 크고 윤나는 도토리임을 발견합니다. 그 순간 시인은 궁금해하며 도토리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니? 내가 너 보다 더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니?’ 그리고는 도토리에게 삶의 지혜를 건네 줍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땅에 묻혀서 참나무가 되는 것임을 일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묵상하는 마태복음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나시며 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이 마음과 정성을 쏟을 삶의 과제를 알려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세상 가운데 크고 빛나는 존재가 되기 위해 앞다투어 경쟁하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신비>와 <부활의 터전> 속에 묻혀서, 참나무처럼 크고 튼실한 제자들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경쟁과 욕심을 바탕으로 하는 세상적 욕망이 아닌, 주님의 사랑과 은총의 토양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이 되어, 복음의 열매를 맺는 나무로 자라나는 것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소망하셨던 삶의 모습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할 것이니, 내게 붙들려 내 곁에서 살아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믿음의 디딤돌로 삼으며 주님의 뜻을 쫓아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기도
“구원과 사랑의 주님, 부르심을 따라 복음의 전달자로 세상 향해 나아갈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삶의 지침과 살아갈 지향점을 알려 주셨습니다. 복음의 열매를 세상 가운데 맺어가며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주님의 나라를 이 땅에 열어 가라는 그 명령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으로 믿고 따르며, 참나무처럼 튼실한 주님의 제자들이 되어 가게 하옵소서.”
월요일(5/15)
주님이 다스리신다. 위엄을 갖추시고 능력의 허리 띠를 띠시며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세계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한다. 주님, 주님의 왕위는 예로부터 견고히 서 있었으며, 주님은 영원 전부터 계십니다. 주님, 강물이 소리를 지릅니다. 강물이 그 소리를 더욱 높이 지릅니다. 강물이 미친 듯이 날뛰며 소리를 높이 지릅니다. 큰 물 소리보다 더 크시고 미친 듯이 날뛰는 물결보다 더 엄위하신 주님, 높이 계신 주님은 더욱 엄위하십니다. 주님의 증거는 견고하게 서 있으며, 주님의 집은 영원히 거룩함으로 단장하고 있습니다. (시편 93:1-5)
묵상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어린 시절 아버지 아버지의 모습을 그의 자서전에 기록했습니다. 어느 해 여름, 그는 아버지와 함께 포도밭에 있는 오두막에서 지내다가, 갑자기 닥친 폭풍우를 경험했습니다.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고, 큰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그 때 집에 두고 온 건조중인 포도를 지켜야 했기에 아버지는 집으로 황급히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이미 하수도가 넘쳐서 길바닥이 강물처럼 변했고, 집집마다 한 해 동안 고생해서 수확해서 반쯤 말려 놓은 포도가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길바닥에 흘러 넘친 물에 휩쓸려 가고 만 것입니다. 이곳 저곳 마을에서 사람들의 울음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 했습니다.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흐느껴 우실 것인지, 아니면 고함을 치며 절망에 휩싸여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집에 도착한 그는 건조하고 있었던 포도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을 발견했습니다. 아버지는 말없이 문간에 서서 수염을 깨물고 있었고, 어머니는 곁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께 “아버지, 포도가 다 없어졌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큰소리로 답했습니다. “시끄럽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 순간을 인생의 큰 교훈으로 여기며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그가 인간으로서 위기를 맞을 때마다 위대한 교훈으로 떠 올렸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영적 교훈으로 삼는 시편 93편은 말합니다. “주님이 다스리신다. 위엄을 갖추시고 능력의 허리 띠를 띠시며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세계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한다.” 시인은 흔들리지 않는 삶의 자세가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위엄에 우리가 집중할 때 가능하다고 알려 줍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리고 혼자 힘으로 삶의 흔들림을 감당할 수 없지만, 세상과 사람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의지하면, 우리 삶의 자세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이어서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왕위는 예로부터 견고히 서 있었으며, 주님은 영원 전부터 계십니다. 주님, 강물이 소리를 지릅니다. 강물이 그 소리를 더욱 높이 지릅니다. 강물이 미친 듯이 날뛰며 소리를 높이 지릅니다. 큰 물 소리보다 더 크시고 미친 듯이 날뛰는 물결보다 더 엄위하신 주님, 높이 계신 주님은 더욱 엄위하십니다. 주님의 증거는 견고하게 서 있으며, 주님의 집은 영원히 거룩함으로 단장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말에 귀를 더욱 기울이면 더욱 분명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강물이 소리지르고 미친 듯이 날뛰며 우리 삶에 물결치더라도, 우리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음은 ‘큰 물 소리보다 더 크시고 미친듯이 날뛰는 물결보다 더 엄위하신 주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시고, 위엄하신 주님의 증거가 우리 삶 가운데 견고히 서 있으며, 주님의 집은 영원히 거룩함으로 단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평생 동안 인생 교훈으로 삼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 올려 볼 수 있습니다. 거세게 몰아닥친 인생의 파도 혹은 고통의 물결에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시선을 다른데 두지 않고, 꼼짝 않고 그 재난을 지켜보며, 자신 앞에 닥친 낙심의 물결을 잠재웠습니다. 그의 초연함은 오늘 묵상하는 시편에 기록된 왕이신 주님의 위엄을 연상시킵니다. 수고와 땀이 어린 수확물을 한 순간에 잃어버렸지만,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라고 말하며, 삶의 용기를 잃지 않았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아버지처럼, 우리 또한 초연한 모습으로 삶의 거친 파도 앞에 나설 수 있습니다. <큰 물 소리보다 더 크시고 미친듯이 날뛰는 물결보다 더 엄위하신> 주님을 믿고 따르면, 우리 또한 그렇게 용기있고 침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낙심의 상황에서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그 음성을 우리 마음 속에 새기며, 오늘 주어진 삶의 길 위에서 용기와 끈기를 잃지 않고 삶의 여정을 이어가길 기원합니다.
기도
“구원과 사랑의 주님, 삶을 흔드는 파도와 폭풍우 가운데, 세상을 호령하시는 주님의 위엄에 시선을 떼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낙심의 파도가 밀려오고, 불안의 폭풍우가 닥쳐와도, <우리를 늘 세상에 있게 하시고, 살게 하시고, 걷게 하시는> 주님의 능력과 위엄에 마음과 영혼을 잇대어 살게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