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부터 화요일, 그리고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각자의 자리에서 5분간 말씀을 묵상하고,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마칩니다.
토요일(5/13)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조금 있으면,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 (요한복음 14:18-21)
묵상
예수님께서는 홀로 남겨질 제자들을 생각하셨습니다. 스승과 함께 길을 걸어오던 제자들이 스승 없이 가던 길을 지속해야 할 때를 준비하시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장차 머물 곳을 준비하시겠다고 약속하심과 함께, 그들과 더불어 함께 걸어갈 보혜사, 곧 위로자요, 권면자요, 안내자가 그들 곁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런 약속과 함께 오늘 이 아침 묵상하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조금 있으면,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사람 안에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마음과 뜻에서 일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둘이었던 두 사람이 한 뜻 안에서 일치를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룰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의 마음과 뜻이 예수님의 마음과 뜻과 오롯이 연합을 이룰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예수님과의 연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보혜사 성령의 역할입니다. 보혜사는 우리 곁에 다가서서 삶의 흔들림을 잡아 주고,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위로해 주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시는 분입니다. 또한 우리의 영혼과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어긋나지 않도록, 삶의 든든한 뿌리를 세워주시고,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과 어긋나도록 방해하는 것들을 막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뜻과 마음에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기 위해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보혜사 성령의 적극적인 도움과 안내인 것입니다.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우리가 주님 안에,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강조하는 요한복음서를 묵상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 모두에게 믿음의 단단한 뿌리가 세워지고, 우리를 구속하는 세상의 움직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은혜가 찾아오길 기원합니다.
기도
“자비와 은총의 주님, 우리를 세상 가운데 홀로 두시지 않을 것을 약속하시며 보혜사 성령을 약속해 주신 예수님의 약속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령의 뜨거운 불길이 임하게 될 오순절 사건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있을 것을 강조하시며, 마음과 뜻에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살아갈 것을 격려하시는 예수님을 우리 마음 속에 늘 모시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금요일(5/12)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안다.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 (요한복음 14:15-17)
묵상
제자들에게 <먼 길을 내다 볼 눈>을 갖게 하려고, 장차 일어날 일을 알려 주시며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처소를 마련가러 떠나시고, 때가 되면 돌아오셔서 주님께서 마련하신 그 곳으로 사람들을 데려 가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제자들에게 주신 후, 예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안다.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헬라어로 보혜사를 뜻하는 <파라클레토스>는 원래 ‘변호인’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와 함께 파라클레토스는 위로, 권면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를 종합해 볼 때, 보혜사는 우리와 동행하며, 흔들리는 삶 속에서 우리를 안내하고, 붙들어주고, 위로하고, 권면해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와 뜻을 전해 주고, 우리 곁을 붙들어 주시는 분이 바로 보혜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보혜사가 영원히 사람들과 함께 하실 것이고,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께서는 그를 맞아 들이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 안에 계실 것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우리 모두, 성령 강림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맞이할 성령의 불길을 기다리며 오늘은 보혜사 성령을 약속해 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 곁을 붙드시고, 삶의 흔들림을 바로 잡아 주시며, 우리 마음과 영혼을 위로하고, 삶의 나아갈 바를 권면하시는 보혜사 성령의 은혜가 오늘의 삶에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주님, 우리 삶을 붙들어 주시기 위해 우리 곁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 모두에게 삶의 중심이 바로 세워지게 도와 주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의 위로자 되시고, 안내자 되시며, 권면자 되시는 보혜사 성령의 임재를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느끼게 하옵소서.”
목요일(5/11)
그러므로 여러분이 열심으로 선한 일을 하면,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며, 흔들리지 마십시오. 다만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 그러나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답변하십시오.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그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여러분의 선한 행실을 욕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헐뜯는 그 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베드로전서 3:13-17)
묵상
초대 교회를 이끌던 사도들은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과 예수께서 삶으로 이루신 구원의 길을 전하며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들은 때로 매를 맞기도 했고,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모진 고초를 당하며 짙은 어둠의 시간을 통과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며, 묵묵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걸어 갔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었던 베드로가 오늘 묵상하는 그의 편지, 곧 믿음의 벗들을 향한 서신에서 말합니다. “여러분이 열심으로 선한 일을 하면,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며, 흔들리지 마십시오.” 복음을 위해 걷는 길을 포기하지 말고 그 길을 끝까지 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흔들리지 말고 걷던 길을 멈추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런 믿음의 격려를 하는 그의 마음에는 어떻게 이런 용기가 채워질 수 있었을까요? 그가 말합니다. “다만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 그러나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답변하십시오.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그에 따르면, 담대한 용기 가운데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은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마음 속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일치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꿈꾸셨던 꿈을 나의 꿈으로 삼으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세상 사람들을 위해 큰 집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 집의 이름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시인 정현종이 <한 그루 나무와도 같은 꿈이>라는 시에서 노래합니다. “요새의 내 꿈은/방이 많은 집 하나 짓는 일이야/ 그래 이 세상의 떠돌이와 건달들을 먹이고 재우고,/이쁜 일탈자들과 이쁜 죄수들,/거꾸로 걸어다니는 사람과 서서 자는 사람,/눈감고 보는 사람과 온몸으로 듣는 사람,/발에 지평선을 감고 다니는 사람,/자동차 운전 못하는 사람,/원시주의자들,/말더듬이,/굼벵이,/우두커니,/하여간 그런 그악스럽지 못한 사람들을 먹이고 재우게 방이 많은 집 하나 짓는 일…” 시인의 노래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짓고자 하셨던 커다란 집은 ‘방이 많은 집’이었고, 그 집에 들어서면 세상의 떠돌이도 방을 얻고, 거꾸로 걸어 다니는 사람, 서서 자는 사람도 쉴 곳을 얻고, 말더듬이, 굼벵이, 우두커니 등 세상을 재빠르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 집에 들어서면 삶의 처소를 얻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마음 속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라고 권면할 때, 그것은 세상 가운데 방이 많은 집을 짓는 꿈으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꿈으로 삶의 집을 짓고 있나요? 우리 모두, 방이 많은 집, 세상의 거리에서 떠돌이로 살아가고, 기댈 곳, 머물 곳 없어 방황하는 사람들의 머물 곳 과 쉴 곳이 있는 방이 많은, 그런 집을 지을 꿈으로 오늘을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구원의 주님, 사도 베드로의 권면을 통해 오늘 살아가는 우리 삶의 주소를 점검했습니다.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갈 것을 권면하는 그의 음성을 들으며, 그리스도께서 꿈꾸셨던 하나님 나라를 떠 올려 보았습니다. 쉴 곳 없어 방황하고, 머물 곳 없어 추위에 떠는 사람들이 모두 모두 머물 방 많은 집과 같은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소망하고, 그 나라의 확장을 위해 헌신하고 수고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수요일(5/10)
백성아, 우리의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을 찬양하는 노랫소리, 크게 울려 퍼지게 하여라. 우리의 생명을 붙들어 주셔서, 우리가 실족하여 넘어지지 않게 살펴 주신다. 하나님, 주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셔서, 은을 달구어 정련하듯 우리를 연단하셨습니다. 우리를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우리의 등에 무거운 짐을 지우시고, 사람들을 시켜서 우리의 머리를 짓밟게 하시니, 우리가 불 속으로, 우리가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마침내 건지셔서, 모든 것이 풍족한 곳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내가 번제를 드리러 주님의 집으로 왔습니다. 이제 내가 주님께 서원제를 드립니다. 이 서원은, 내가 고난받고 있을 때에, 이 입술을 열어서, 이 입으로 주님께 아뢴 것입니다. 내가 숫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번제물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옵니다. 숫염소와 함께 수소를 드립니다.(셀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아, 오너라. 그가 나에게 하신 일을 증언할 터이니, 다 와서 들어라. 나는 주님께 도와 달라고 내 입으로 부르짖었다. 내 혀로 주님을 찬양하였다. 내가 마음 속으로 악한 생각을 품었더라면,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응답하여 주시고, 나의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셨다.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한결같은 사랑을 나에게서 거두지 않으신 하나님, 찬양받으십시오. (시편 66:8-20)
묵상
오늘 묵상하는 시편에는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 시편을 따라 기도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함께 드리는 콰이어에 우리가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우리가 함께 부를 노래가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그 시작은 이렇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붙들어 주셔서, 우리가 실족하여 넘어지지 않게 살펴 주신다. 하나님, 주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셔서, 은을 달구어 정련하듯 우리를 연단하셨습니다. 우리를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우리의 등에 무거운 짐을 지우시고, 사람들을 시켜서 우리의 머리를 짓밟게 하시니, 우리가 불 속으로, 우리가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마침내 건지셔서, 모든 것이 풍족한 곳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시인은 우리에게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실족하여 넘어지지 않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가 부를 노래가 되신다고 시인은 알려 줍니다. 또한 우리 삶이 그물에 걸린듯 어려움을 겪고, 우리 삶의 어깨에 올라있는 삶의 짐이 무거워지더라도, 시인은 도우시는 주님의 손길을 신뢰합니다. 그는 주님께서 마침내 우리를 건지서서 모든 것을 풍족한 곳으로 이끌어 주실 것을 신뢰합니다. 이런 신뢰와 믿음 가운데 시인은 하나님께 번제와 서원제를 드리며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아, 오너라. 그가 나에게 하신 일을 증언할 터이니, 다 와서 들어라. 나는 주님께 도와 달라고 내 입으로 부르짖었다. 내 혀로 주님을 찬양하였다. 내가 마음 속으로 악한 생각을 품었더라면,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응답하여 주시고, 나의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셨다.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한결같은 사랑을 나에게서 거두지 않으신 하나님, 찬양받으십시오.” 시인은 우리가 도와 달라고 부르짖고 간청하는 사람들에게 꼭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또한 시인에 따르면, 우리의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한결같은 사랑을 우리에게서 잠시도 거두지 않으십니다. 이 아침, 우리 귓가에 들려오는 시인의 노래로부터 우리는 어떤 삶의 노래를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 삶에서 <노래>는 <영혼의 울림>이요, <마음의 외침>입니다. 무슨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는가는 우리 영혼이 무엇에 떨리고, 우리 마음이 누구에게 인사를 건네는지 말해 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 그리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고백과 외침>을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기도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주님 앞에 감사와 고백의 제사를 드리며, 찬양 가운데 주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주님을 향한 노래가 우리 삶의 의미와 기쁨을 더하게 하시고, 주님 앞에 드리는 감사와 고백이 우리 삶을 풍성하게 채우는 복된 성품이 되게 하옵소서.”
화요일(5/9)
바울이 아레오바고 법정 가운데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 내가 다니면서, 여러분이 예배하는 대상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며, 그들이 살 시기와 거주할 지역의 경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7:21-27)
묵상
아테네 사람들은 수많은 신들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그들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신들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존재하고 있으나 아직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문구를 새긴 제단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했던 것은 자신들의 도시 아테네를 ‘알지 못하는 신들’의 저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으로 잠작할 수 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바울은 이 점을 고려하여 설교하려 했습니다. 보통 그가 설교시 했던 방식, 곧 유대 역사를 언급하고, 히브리 성서를 인용하는 대신, 아테네 사람들에게 이미 익숙했던 종교적 컨텍스트 안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려 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며, 그들이 살 시기와 거주할 지역의 경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바울은 ‘아직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을 위해 제단을 쌓던 아테네 사람들에게 하늘과 땅과 세상 만물을 누가 창조했는지 알려 줍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전합니다. 또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임을 알려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두려움 속에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해 쌓았던 제단은 무의미한 제단이며, 그들이 진정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 신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세상을 이끌어 오신 하나님이시라고 알려 줍니다. 이렇게 말하는 바울의 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알수 없는 신들>을 위한 제단을 쌓았던 아테네 사람들에게,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고, 사람이 찾기를 기다리시고, 찾기만 하면 바로 만나지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 아침, 바울을 통해 얻는 믿음의 진리에 감사하며, 우리 모두 더듬어 찾기만 만나게 되는 하나님께 더욱 긴밀히 접속되어, 세상살이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임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기도
“구원과 사랑의 주님,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전한 믿음의 진리를 묵상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신이 있지만, 그 이름을 다 알 수 없기에 <알수 없는 신들에게>라는 문구를 적어 제단을 쌓던 아테네 사람들에게 바울은, 분명하고 선명하게 천지를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은 더듬어 찾기만 해도 만나게 되는 분이라고 설교하는 바울에게서 우리 믿음의 자리를 점검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세상 만물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에 초점을 맞추고, 진리의 길을 걸어가게 하옵소서.”
월요일 (5/8)
이스라엘아, 대답해 보아라. 주님께서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우리가 어떠하였겠느냐? “주님께서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원수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났을 때에, 원수들이 우리에게 큰 분노를 터뜨려서, 우리를 산 채로 집어삼켰을 것이며, 물이 우리를 덮어, 홍수가 우리를 휩쓸어 갔을 것이며, 넘치는 물결이 우리의 영혼을 삼키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를 원수의 이에 찢길 먹이가 되지 않게 하신 주님을 찬송하여라. 새가 사냥꾼의 그물에서 벗어남같이 우리는 목숨을 건졌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풀려 났다. 천지를 지으신 주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시편 124:1-8)=
묵상
오늘 묵상하는 시편에는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순례자는 지향점이 분명한 사람이고, 흔들리더라도 오뚜기처럼 일어서서 지향점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향점을 향해 걷는 순례자의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걸어갈 <밖을 살피는 능력>이 아니라, 걷고 있는 <나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는 힘입니다. 시인은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이스라엘아, 대답해 보아라. 주님께서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우리가 어떠하였겠느냐?” 시인은 자신의 내면을 붙들고 있는 확신과 믿음에 대해 당당히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 주셨기에 삶의 든든한 힘이 채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어서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원수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났을 때에, 원수들이 우리에게 큰 분노를 터뜨려서, 우리를 산 채로 집어삼켰을 것이며, 물이 우리를 덮어, 홍수가 우리를 휩쓸어 갔을 것이며, 넘치는 물결이 우리의 영혼을 삼키고 말았을 것이다.”
삶에는 넘치는 물결이 우리 삶을 흔들고 홍수 같은 큰 파도가 우리 앞을 가로 막을 때가 있습니다. 그 앞에서 위축되고, 두렵고, 염려하고, 막막해 하는 것은 연약한 인간의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위축되지 않습니다. 주저 앉지도 않습니다. 당당히 일어서서 소리 높여 노래합니다. “우리를 원수의 이에 찢길 먹이가 되지 않게 하신 주님을 찬송하여라. 새가 사냥꾼의 그물에서 벗어남 같이 우리는 목숨을 건졌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풀려 났다. 천지를 지으신 주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시인이 찬양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원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도록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원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셨기에, 목숨을 건졌고, 그물이 찢어졌기에,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124편을 통해 묵상의 은혜를 얻는 이 아침, 순례자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우리가 간직한 삶의 지향점을 점검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 우리 편이 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세상의 파도에 주눅들지 말고, 순례자의 길을 꾸준하고 성실하게 걸어가길 기원합니다.
기도
“구원과 사랑의 주님, 순례자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주님의 성전으로 들어선 아침입니다. 하나님께서 든든히 곁을 지켜 주시니 두려움도 염려도 없다고 하는 시편의 시인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하루를 시작하는 이 아침, 우리 삶의 지향점을 분명히 하고 하룻길을 힘차게 떠나게 하옵소서. 삶의 파도에 위축되거나 주눅들지 않고 힘차게 삶의 물결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부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