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자비하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 위에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봄을 맞이한 들판이 연두색 봄의 색깔로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습니다. 겨울 동안 얼었던 땅이 녹고, 말랐던 풀들이 봄인사를 하며 푸르게 바뀌어가고 있는 싱그러운 계절이 되면, 사람들 뿐 아니라 들판 위의 모든 동식물들이 봄을 맞이한 기쁨을 나눕니다. 새벽녘 창밖을 통해 들려오는 새소리도 왠지 겨울보다 더 크고 힘차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새들의 노래 소리에 봄의 기운이 스며있는듯 합니다. 봄을 맞이하며 연두빛 옷을 입은 들판을 보며 시편 23편에 등장하는 <푸른 풀밭>이 연상되었습니다. 시편의 시인(다윗)은 우리의 목자되시는 주님께서 양과 같은 우리를 푸른 풀밭으로 이끄신다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떼쉐>는 땅을 덮고 있는 작고 부드러운 풀을 가리킵니다. 사무엘하 23장 에는 다윗이 그의 인생에 마지막 남긴 말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하 23장 3절과 4절에서 다윗이 말합니다. “모든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다스리는 왕은, 구름이 끼지 않은 아침에 떠오르는 맑은 아침 햇살과 같다고 하시고, 비온 뒤에 땅에서 새싹을 돋게 하는 햇빛과도 같다고 하셨다.” 여기서 <새싹>이란 의미로 <떼쉐>가 쓰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떼쉐’는 비가 온 뒤에 축축한 땅에 돋아나는 ‘어린 풀’과 ‘식물의 새싹’을 의미합니다.

우리 눈 앞에 펼쳐진 이 봄의 들판을 보며, 양들이 먹을 목초지를 나타내는 푸른 풀밭이 우리가 맞이한 이 연두빛 풀밭과 같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부드러워 먹거리로 삼기 좋아 보이고, 포근해서 누워서 쉬기 좋아 보이는 이 봄의 풀밭이 마치 다윗이 언급하는 양들에게 마련된 푸른 풀밭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아침입니다. 예배에 함께 하신 모든 분들 앞에 목자되시는 주님께서 안내해 주시는 생명의 푸른 풀밭이 삶 가운데 펼쳐지길 기원합니다.

오늘 예배 가운데 묵상하는 말씀 중 하나인 시편 23편…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라고 노래하며 시작되는 다윗의 이 시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시편입니다. 그 구절 구절 마다 우리 인생의 순간 순간이 여러 모습으로 스며있어서 기쁨과 감사의 자리에서는 그 기쁨과 감사가 배가 되게 하고, 슬픔과 아픔의 자리에서는 더 없는 위로를 주는 그런 아름다운 믿음의 노래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어귀에 수차례 이 시편을 되뇌이며 삶의 고비 고비를 통과해 왔고, 어둡고 아슬아슬한 협로를 걸어왔습니다. 목자의 역할은 양을 보호하고, 그 길을 인도하는 것이기에, ‘주님께서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는 것은 목자되신 주님께서 위협과 위험으로부터 우리 생명을 보호해 주시고, 우리의 <살 길>과 <갈 길>을 인도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런 신뢰와 믿음 가운데 시인은 노래합니다. <내게 부족함 없어라!>. 살면서 부족함 혹은 결핍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시인이 이렇게 고백하며 노래하는 것은, 때때로 필요가 채워지지 않고, 고단한 삶의 조건이 개선되지 않더라도 목자되신 주님께서 <삶의 지향점>을 분명히 일러 주시기 때문입니다. <갈 곳이 분명한 사람>은 부요한 사람입니다. <따라갈 안내자>가 있는 사람 또한 복되고 부요한 사람입니다. 더우기 그 안내자가 <눈밝은 안내자>이면 더더욱 행복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이 ‘내게 부족함이 없어라’라고 노래하는 것은, 삶에서 때때로 겪는 부족함과 결핍들이 삶의 긴 여정을 생각할 때, 삶을 얽매는 요소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부족한 것 없이 채워 주시는 목자이신 주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시인은 경탄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넓고 깊고 따스한 품을 경험하고도 감격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메마른 영혼의 사람일 것입니다. 시인의 감격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귀한 존재가 되는 것처럼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 더우기 목자되시는 하나님께 귀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더더욱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그 감격에 ‘내 잔이 넘칩니다’하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 가운데 묵상하는 또 하나의 말씀인 요한복음 10:1-10은 목자이신 예수님과 목자 예수님을 따르는 양떼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 가운데 말씀하셨습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자기 양들을 다 불러낸 다음에, 그는 앞서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양들은 결코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고, 그에게서 달아날 것이다. 그것은 양들이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던 무리들은 이미 자신들의 신앙의 컨텍스트 안에서 시편 23편에 친숙해져 있었습니다. 어느 말씀을 읽더라도, <목자이신 주님>이라는 표현을 만난다면, 시편 23편을 마음 속에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우리처럼, 예수님 앞에서 그 말씀을 듣던 무리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 자신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아온 목자의 이미지/모습을 떠올렸을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목자가 안내하는 푸른 초장을 떠 올렸을 것이고, 푸른 초장 옆에 형성된 맑은 연못을 떠 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보다 더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의 중요한 포인트는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할 선한 목자를 따르는 양이 있고, 그렇지 않는 양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이 열어 주는 말씀의 이미지 속에는 등장하지 않는 측면입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중요한 것은 그 음성을 듣고 목자임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따라갈 목자임을 알면 그 목자를 따라가지만, 그 음성을 듣고도 목자임을 구분하지 못하면 목자를 따라 나서지 못한다는 것이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 즉 호명의 행위에는 호명하는 대상에 <의미와 가치를 입혀주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춘수 시인의 시, <꽃>에는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부르는 호명행위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누군가를 아름다운 <꽃>이 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갈 때, 어떤 일이 생길까요? 목자를 따라가는 양은 목자의 호명행위, 곧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통해 그 존재에 <의미와 가치의 옷>이 입혀지고, 목자를 따라감으로써 목자와의 친밀한 <관계의 울타리> 안에 들어서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돌봄과 성장을 위한 든든한 디딤돌 위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짧게 언급한 바와 같이,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호명받는 양들에게 중요한 것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십니다.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지 못하는 양은 자신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을 듣고서도 목자를 따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이미 목자와 양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시간과 정성을 기울여 목자가 양들과의 친밀함을 심화시켜왔고, 양들은 그 관계 속에서 목자의 음성에 익숙해져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목자의 음성이 들려 왔을 때,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며, 목자의 호명 속에서 목자를 따르는 양은 <복된 삶의 자리>로 안내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름을 부르는 목자를 따라간다는 것은 목자의 음성 속에 스며있는 <사랑>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목자의 사랑이 양을 부르는 것이고, 양은 그 사랑을 감지하며 목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이 담긴 음성> 하면 떠오르는 것이 아마도 아기를 품에 안은 엄마의 음성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태교 중에 중요한 것이 태중에 있는 아이에게 말을 건네고, 노래를 불러 주면서 자꾸만 아이가 엄마의 음성에 노출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만기출산일보다 먼저 태어난 경우, 뇌의 청각영역이 충분히 발달되지 않은 상태로 태어났기에, 언어를 듣고 처리하는 능력이 발달되는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인큐베이터에 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엄마의 심장박동 소리와 음성을 녹음하여 아기에게 들려줌으로써 엄마의 태중에 아이가 있을 때처럼 환경을 조성해 준 결과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합니다.

2015년, 브리검 워먼 병원에 입원한 40명의 미숙아 아이들의 엄마들이 연구에 참여한 연구에서 엄마들은 스튜디오에서 “반짝 반짝 작은 별” 노래를 부르고 “Goodnight Moon”이라는 동화를 읽어서 녹음했습니다. 연구진은 녹음 소리에 포함된 소음을 제거한 후 45분짜리 음성 클립을 21명의 미숙아들에게 하루에 3시간씩 30일 동안 들려줬습니다. 한편 다른 19명의 아이들에게는 표준적인 치료를 받게 하고, 30일 후에 두 그룹의 뇌영상을 초음파로 촬영하여 비교해 보았습니다. 비교분석 결과, 엄마의 음성에 노출된 아기들은 그렇지 않은 아기들에 비해 뇌의 청각피질이 유의하게 두꺼워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엄마의 음성이 아이의 뇌발달을 돕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엄마의 음성은 사랑의 음성이고, 사랑의 음성은 그 사랑의 음성을 느끼는 이를 성장시키고 치유합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에 담긴 사랑, 양들은 그 사랑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통해 전해지는 사랑의 울림을 듣고, 그 사랑의 울림에 마음이 울려 양들은 목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오늘 이 자리, 예배와 찬양과 기도의 자리에 함께 한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이 약속의 음성에는 <사랑>이 스며 있고, <돌봄>이 담겨 있고, <구원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이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들이 바로 우리들임을 묵상하는 이 자리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선명하고 맑게 듣기 소망합니다. 그 음성을 듣고도, 우리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점검해야 할 영적 신호입니다. 흐트러진 주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며, 우리를 호명하시는 주님을 향해 힘차게 뛰어나가서, 주님께서 입혀 주시는 <생명과 은혜의 옷>을 기쁘게 입길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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