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부터 화요일, 그리고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5분간 말씀을 묵상하고,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마칩니다.


토요일(4/29)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시편 23:1-6)  

묵상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라고 노래하는 다윗의 시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시편입니다. 우리 인생의 어귀에 수차례 이 시편을 되뇌이며 삶의 고비를 통과했고, 어둡고 아슬아슬한 협로를 걸어왔습니다. 목자의 역할은 양을 보호하고, 그 길을 인도하는 것이기에, ‘주님께서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는 것은 목자되신 주님께서 위협과 위험으로부터 우리 생명을 보호해 주시고, 우리의 <살 길>과 <갈 길>을 인도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런 신뢰와 믿음 가운데 시인은 노래합니다. <내게 부족함 없어라!>. 살면서 왜 부족함이 없었을까요? 그런데도 이렇게 고백하며 노래하는 것은, 때때로 필요가 채워지지 않고, 고단한 삶의 조건이 개선되지 않더라도 목자되신 주님께서 <삶의 지향점>을 분명히 일러 주시기 때문입니다. <갈 곳이 분명한 사람>은 부요한 사람입니다. <따라갈 안내자>가 있는 사람 또한 복되고 부요한 사람입니다. 더우기 그 안내자가 <눈밝은 안내자>이면 더더욱 행복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이 ‘내게 부족함이 없어라’라고 노래하는 것은, 삶에서 때때로 겪는 부족함과 결핍들이 삶의 긴 여정을 생각할 때, 삶을 얽매는 요소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부족한 것 없이 채워 주시는 목자이신 주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시인은 경탄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넓고 깊고 따스한 품을 경험하고도 감격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메마른 영혼의 사람일 것입니다. 시인의 감격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귀한 존재가 되는 것처럼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 더우기 목자되시는 하나님께 귀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더더욱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그 감격에 ‘내 잔이 넘칩니다’하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주를 마무리하는 토요일 아침입니다. 지난 한 주 우리는 어디에서, 어느 때에 목자 되시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했고,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까? 또한 우리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어떻게 경험했습니까? 이 아침 <묵상의 눈과 귀>를 활짝 열어 선한 목자되시는 주님의 동행하심을 다시 한번 선명히 확인하길 기원합니다.

기도

“구원의 주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총과 우리를 돌보시는 목자 같은 사랑에 감사 드립니다. 늘 삶의 여러 부분에 자리 잡은 결핍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저희들이 다윗의 시편을 묵상하며, <내게 부족함 없어라>라고 노래하는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에게 부족하고 결핍된 것이 없지 않았을 것을 알기에, 그의 고백과 노래가 주님을 향한 깊고도 깊은 신뢰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께닫습니다. 주님, 우리 또한 다윗을 닮아 주님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심을 삶의 모든 자리에서 고백하게 도와 주시고, 부족한 것 없이 채워주시는 주님의 선한 마음과 그 손길에 감격하게 하옵소서.”


금요일(4/28)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이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양들의 목자이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자기 양들을 다 불러낸 다음에, 그는 앞서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양들은 결코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고, 그에게서 달아날 것이다. 그것은 양들이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요한복음 10:1-6) 

묵상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 즉 호명의 행위에는 호명하는 대상에 <의미와 가치를 입혀주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춘수 시인의 시, <꽃>에는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부르는 호명행위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누군가를 아름다운 <꽃>이 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갈 때, 어떤 일이 생길까요? 목자를 따라가는 양은 목자의 호명행위, 곧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통해 그 존재에 <의미와 가치의 옷>이 입혀지고, 목자를 따라감으로써 목자와의 친밀한 <관계의 울타리> 안에 들어서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돌봄과 성장을 위한 든든한 디딤돌 위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호명받는 양들에게 중요한 것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십니다.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지 못하는 양은 자신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을 듣고서도 목자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이미 목자와 양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시간과 정성을 기울여 목자가 양들과의 친밀함을 심화시켜왔고, 양들은 그 관계 속에서 목자의 음성에 익숙해져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목자의 음성이 들려 왔을 때,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며, 목자의 호명 속에서 목자를 따르는 양은 <의미와 가치의 옷>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들이 바로 우리들임을 묵상하는 이 자리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선명하고 맑게 듣기 소망합니다. 그 음성을 듣고도, 우리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점검해야 할 영적 신호입니다. 흐트러진 주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며, 우리를 호명하시는 주님을 향해 힘차게 뛰어나가서, 주님께서 입혀 주시는 <생명과 은혜의 옷>을 기쁘게 입길 기원합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주님,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부드러운 음성으로 불러 주십니다. 우리를 호명하시는 주님 음성에 기쁨으로 화답하며, 주님 이끄시는 길을 따라 힘차게 걸어가게 하옵소서. 그 귀한 음성을 듣고도, 주님 이끄시는 길에 대한 확신이 없어, 주님을 따라나서지 못할 때가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안내하시는 길이 아름다운 인생길임에도, 우리의 시야가 짧고 좁아서 그 길 위에서 올라서지 못했습니다. 사랑과 긍휼의 주님, 주님의 음성에 온전히 붙들려서, 그 음성이 안내하는 길 위에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얻게 하옵소서.”


화요일(4/25)

이스라엘아, 대답해 보아라. 주님께서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우리가 어떠하였겠느냐? “주님께서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원수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났을 때에, 원수들이 우리에게 큰 분노를 터뜨려서, 우리를 산 채로 집어삼켰을 것이며, 물이 우리를 덮어, 홍수가 우리를 휩쓸어 갔을 것이며, 넘치는 물결이 우리의 영혼을 삼키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를 원수의 이에 찢길 먹이가 되지 않게 하신 주님을 찬송하여라. 새가 사냥꾼의 그물에서 벗어남같이 우리는 목숨을 건졌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풀려 났다. 천지를 지으신 주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시편 124:1-8)

묵상

오늘 묵상하는 시편에는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순례자는 삶의 지향점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사람이 아닌, 갈 곳을 향해 마음의 중심이 굳게 세워진 사람입니다. 주님께로 향하는 분명한 삶의 지향점을 지닌 순례자인 시인은 주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 주셨고, 우리 편이 되어 주신 주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삶의 자리에 우리가 있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고백을 들으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원수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났을 때에, 원수들이 우리에게 큰 분노를 터뜨려서, 우리를 산 채로 집어삼켰을 것이며, 물이 우리를 덮어, 홍수가 우리를 휩쓸어 갔을 것이며, 넘치는 물결이 우리의 영혼을 삼키고 말았을 것이다.” 여기서 ‘물’은 혼돈의 상황을 의미합니다. ‘홍수’는 우리의 삶을 압도하는 힘이 있습니다. ‘원수’는 우리 삶을 위기 가운데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물과 홍수와 원수 모두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삶의 조건들입니다. 순례자는 이러한 통제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 우리에게 닥치더라도, 우리 편에 서 계시는 주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도우심에 힘입어 삶의 지향점을 향하어 굳굳히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시편의 시인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주님을 향한 지향점 위에 서서 인생의 길을 걷는 순례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의 순례자입니까? 우리 인생은 때때로 ‘물과 홍수와 원수들’과 같은 우리의 통제 바깥으로부터 우리에게 찾아오는 ‘도전’과 ‘파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삶의 도전과 파도를 통과하며 우리의 지향점 되시는 주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들입니다. 우리의 순례길에 신실한 동행이 되어 주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늘 도우시길 기원합니다.

기도

구원과 사랑의 주님, 거세게 몰아치는 삶의 파도 속에서도 우리 편이 되어 주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우리의 지향점 되시는 주님을 향해 굳굳히 걸어 나아가는 순례자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 묵상하는 시편의 시인의 고백처럼, ‘천지를 지으신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믿음 아래에서, 삶의 중심과 방향을 늘 바로 세우며, 주님 향해 나아가게 하옵소서.” 


월요일 (4/24)

주님은 은혜로우시고 의로우시며, 우리의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다. 주님은 순박한 사람을 지켜 주신다. 내가 가련하게 되었을 때에, 나를 구원하여 주셨다. 내 영혼아, 주님이 너를 너그럽게 대해 주셨으니 너는 마음을 편히 가져라. 주님, 주님께서 내 영혼을 죽음에서 건져 주시고, 내 눈에서 눈물을 거두어 주시고, 내 발이 비틀거리지 않게 하여 주셨으니,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살렵니다. (시편 116:5-9)

묵상

주님의 은혜로우심과 의로우심, 그리고 긍휼하심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긍정의 영>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 의로우심, 그리고 긍휼하심을 고백하는 근거는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의 출애굽 사건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사람들, 곧 당시의 주변인들이었던 이스라엘을 억압의 땅으로부터 구해내셨습니다. 이 사건을 바울의 고백의 렌즈로 바라 본다면 이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장 28절에서 그가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다.” 세상을 호령하던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비천한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잘나고 강하다’고 여겨지던 한 나라의 힘을 무력화 시키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의 가장 원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묵상하는 시편의 시인은 이러한 고백 위에 서서 주님께 찬양을 올립니다. “주님은 순박한 사람을 지켜 주신다. 내가 가련하게 되었을 때에, 나를 구원하여 주셨다. 내 영혼아, 주님이 너를 너그럽게 대해 주셨으니 너는 마음을 편히 가져라. 주님, 주님께서 내 영혼을 죽음에서 건져 주시고, 내 눈에서 눈물을 거두어 주시고, 내 발이 비틀거리지 않게 하여 주셨으니,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살렵니다.” 시인의 노래 구절 구절이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순박한 사람을 지켜 주시는 주님에 대해 시인은 고백하고, 가련한 삶의 때에 도우셨던 주님께 감사합니다. 그런 주님을 떠 올릴 때, 긍정의 영이 그 마음에 차오릅니다. 삶의 걸음을 뗄 때마다, 마음을 편히 가져야 하고, 걱정을 내려 놓을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내 눈에서 눈물을 거두어 주시고, 내 발이 비틀거리지 않게’ 주님께서 해 주신다는 시인의 고백에 귀를 기울이며, 한 주의 시작을 여는 이 아침, <긍정의 영>과 <평안의 영>을 우리 삶 가운데 마중하며, 힘찬 하루를 시작하길 기원합니다.

기도

“구원과 사랑의 주님, 새로운 한 주의 시작에 시편의 시인의 노래를 듣습니다. 주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로우심과 의로우심을 고백하는 시인의 노래 가운데 우리의 자신의 노래를 찾게 하옵소서. 자비로우신 은혜의 손길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손에서 구해 주신 그 긍휼의 사랑을 늘 기억하며, 우리 삶 가운데 만나는 시련과 도전 속에서 주님의 임재와 동행에 눈뜨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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