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각자의 자리에서 5분간 말씀을 묵상하고,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마칩니다
토요일(4/22)
그 두 길손은 자기들이 가려고 하는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더 멀리 가는 척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만류하여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보니, 열한 제자와 또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모두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두 사람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비로소 그를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다. (누가복음 24:28-35)
묵상
엠마오로 향하던 두 사람과 함께 걷던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직 <낯선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언급했던 그 예수님께서 바로 그들 곁을 걷고 계셨지만, 그들의 눈은 절망과 상실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낯선 한 사람>이 자신들의 집 가까이에 이르자, 자신들의 집으로 그를 맞아들입니다. 그들은 <멀리 가는 척>하시던 예수님을 만류하여 말합니다.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 그들의 초대는 ‘예수님을 향한 초대’가 아니라, ‘낯선 사람을 향한 초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예수님인 줄 모르고 집 안으로 맞아 들이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초대를 받아 들이시며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음식을 나누시며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바로 이 때,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마침내 자신들의 삶을 찾아 오신 분이 부활의 예수님임을 보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이 지금껏 함께 걷고 있던 분, 자신들을 찾아 오셔서 함께 동행하셨던 그 분이 바로 자신들이 잃어버렸던 예수님이셨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 본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 불현듯 사라지셨습니다. 에수님이심을 알아채자 예수님께서 어디론가 사라지신 것입니다. 아니, 이제 예수님의 부활사실이 분명히 그들에게 전달되었으니, 예수님께서는 가실 길을 계속 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라지신 후 그들은 서로 말하였습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이제 생각해 보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동행하실 때 있었던 일들이 떠오른 것입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자신들을 찾아오신 분이 누구셨고, 자신들과 동행하셨던 분이 무슨 말을 건네셨으며, 그 낯선 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 잃어버렸던 소망의 주인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깨달음은 그들을 일으켜 세워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이들이 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모여 있던 주님의 제자들에게 살아나신 주님께서 그들도 찾아 오셨다는 소식을 접했고, 그들은 자신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비로소 그를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만난 공동의 경험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어디서, 어떻게 경험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엠마오로 향하고 있던 두 사람은 아직 <낯선 사람>이었던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여 식탁을 나누며 부활의 예수님을 향해 눈을 떴습니다. 어쩌면 바로 이 <낯선 사람>을 우리 삶 안으로 맞이하는 마음이 부활의 주님을 향해 눈을 뜨게 하는 디딤돌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자리에서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깊이 묵상할 질문입니다.
기도
“구원의 주 하나님,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던 두 사람은 아직 ‘낯선 한 사람’이었던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환대와 사랑은 그들 삶에 부활의 주님을 향한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주님, 우리 또한 그들처럼, 낯선 이들을 우리 삶 안으로 맞이하는데 인색하지 않도록 도와 주십시오. 낯선 이의 모습으로 제자들을 찾아 오셨던 부활의 주님을 기억하며, 우리 삶 속에서 경계심과 배타심이 아닌, 사랑과 환대와 돌봄의 마음으로 길 위의 사람들을 맞이하게 하옵소서.”
금요일 (4/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당신들이 걸으면서 서로 주고 받는 이 말들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 때에 그들 가운데 하나인 글로바라는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면서, 이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당신 혼자만 모른단 말입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무슨 일입니까?” 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넘겨주어서,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 우리 가운데서 몇몇 여자가 우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 계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던 몇 사람이 무덤으로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셨다. (누가복음 24:17-27)
묵상
엠마오로 향하고 있던 두 사람은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곁을 걷고 있는 이가 예수님인 줄 알아채지 못하고, 그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행동과 말에 있어 힘 있는 예언자셨는지, 어떻게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의 손을 거쳐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는지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죽으신지 사흘이 지난 지금, 예수님을 장사한 무덤이 비어있고, 천사들이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알려 주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예수님 곁을 걷고 있던 두 사람이 예수님께 이 이야기를 들려 주었을 그 때, 그들에게 예수님은 <낯선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해 말하고 있었으나, 그들 곁에 서 계신 예수님을 낯선 한 사람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어제 묵상했던 바와 같이, 그들의 눈과 생각과 의식이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큰 사건>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향해 열린 시선을 얻기 전까지 그들의 눈은 가려져 있었고, 그들의 생각과 의식은 닫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슬픔에 잠겨 길을 걷고 있었고, 물거품이 되어 버린 희망을 마음 속에 되뇌이며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향하는 길은 그들에게 ‘오르막길’이면서 동시에 ‘내리막길’이었습니다. 절망을 안고 걷고 있었기에 그 길은 <오르막길>이었고, 동시에 희망을 잃고 걷고 있었기에 그것은 <내리막길>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오르막을 오르고 있었고, 그들의 인생은 내리막을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께서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서 설명해 주시면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겪고서 영광에 들어가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오가고 있었던 그들에게 말씀의 빛이 비추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알아볼 눈이 활짝 열리지 못했습니다. 아직 그들에게 주님은 <낯선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엠마오를 향해 가던 두 사람에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절망의 언덕을 오르고 있던 그들에게 찾아 오셨고, 상실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그들에게 찾아 오셔서 함께 걷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부활의 주님께서 희망을 잃고 침통한 표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음을 알려 줍니다.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마음과 영혼과 인생을 안내하는 안내자요, 위로자요, 구원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배움을 얻으며 시작하는 오늘 하룻길의 삶 위에 주님의 사랑과 도우시는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침통한 표정으로 걷고 있던 두 사람에게 부활의 주님께서 말을 건네셨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느냐’고 물으셨으나, 그것은 호기심에서 건네신 인사가 아닌, 돌봄과 위로와 사랑에서 건네신 인사였습니다. 주님, 그 사랑의 인사를 기억하게 하옵소서. 절망의 언덕을 오르고, 상심과 상실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던 주님의 제자들에게 사랑의 인사를 건네시며, 희망을 향한 서광을 비추어 주셨음을 기억하며, 우리 인생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에서 주님 손을 꼭 붙들게 하옵소서.”
기도
마침 그 날에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일어난 이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누가복음 24:13-16)
목요일 (4/20)
마침 그 날에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일어난 이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누가복음 24:13-16)
묵상
예수님의 부활소식이 사람들 사이에 퍼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사실을 확인하고 열 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 말이 어처구니 없는 말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눅 24:11) 그래도 제자 중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무덤 안에는 시신을 감았던 삼베만 놓여 있었습니다. 누가는 베드로가 일어난 일을 이상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다고 전합니다.
이 일이 있던 한편으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가운데 두 사람이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길을 걸으며, 지금껏 일어난 이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고발당하고, 심문받고, 고문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 그리고 죽은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소식에 대해 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그들 곁에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함께 걷기 시작하셨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그들 곁에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누가는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가려져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테오>는 본래 ‘고정되고 변동이 없음’ 혹은 ‘무엇인가에 붙들려 있거나 사로잡혀 있음’을 뜻합니다. 즉 그들의 눈과 의식은 무엇인가에 붙들려 있거나 사로잡혀 있었고, 그들의 눈과 생각/의식을 붙들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죽음’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죽음을 맞이하셨다는 사실이 그들의 의식을 붙들고 있었기에, 그들은 곁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존재를 알아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며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합니다. 죽음이 생명의 끝이라는 생각에 붙들려 있으면, 부활의 진리에 눈을 뜰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시선은 <습관>에 길들여져 있고, 우리들이 보아온 것과 생각해 온 것의 울타리 안에 머무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은 ‘죽음이 생명의 끝’이라는 시선과 생각에서 벗어나 있는, 보이는 세상의 바깥과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생각의 바깥으로부터 침입해 온 <하나님의 거룩한 신비>인 것입니다. 오늘 아침, 엠마오를 향해 걷던 제자들의 모습을 묵상하며, 얻게 된 이 신앙의 지혜를 우리 마음 깊숙히 새겨 넣으며, 부활하신 예수님께 한걸음 더 다가가는 <새로운 시선>을 얻기 소망합니다.
기도
“생명의 주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 곁을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으셨는지, 그리고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까지 서로 이야기 하던 그들 곁에 부활의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시선과 생각이 사로잡혀 있었기에, 곁에 계신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부활을 알아볼 새로운 시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제자들의 이런 모습을 보며, 부활이라는 새로운 생명사건을 선명히 알아 볼 수 있는 맑은 눈과 밝은 눈이 우리에게 열리길 소망하오니, 우리의 소망과 기도에 주님의 은총을 더하여 주옵소서.”
수요일 (4/19)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또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말로 증언하고, 비뚤어진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그들에게 권하였다. 그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그 날에 신도의 수가 약 삼천 명이나 늘어났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사도행전 2:36-47)
묵상
베드로는 자신의 동족들에게 힘 주어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의 주님께서 그를 환대하시고, 그에게 주신 소명에 순종하며, 그가 ‘눈밝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눈밝은 안내자 베드로는 용기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뿌리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내리고 그는 용기와 확신 가운데 자신의 동족들을 무지로부터 깨어나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손에 의해 부당하게 처형되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셔서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힘 주어 말합니다. 이에 사람들은 마음이 찔려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고 물었고, 그들에게 베드로는 말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또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헬라어로 회개에 해당하는 말은 <메타노이아metanoia>입니다. ‘메타’는 ‘너머’를 뜻하고, ‘노이아’는 ‘누스’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정신’을 뜻합니다. 따라서 <회개하다>라는 말의 뜻은 <당신의 정신 너머로 가라>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회개한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 너머로 걸어 올라가서 그리스도께로 간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회개의 경험 속에 우리는 죄 용서를 받고,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이 말을 듣고 세례를 받았고, 이로 인해 신도의 수가 약 삼천 명이나 늘어났습니다. 이들은 함께 모여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습니다. 자신의 정신 너머로 걸어 올라가서 예수께서 이른 사람들이 믿음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묵상하는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은 이들이 모여 살아가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와 같이 공동생활을 함께 한 경우는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공동생활에 비교할 때 초대교회의 공동생활의 특징은 그들의 삶이 <성령의 역사>속에 이루어진 믿음의 사건이요, 거룩한 일상의 신비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총을 경험하고 함께 살아가던 언약의 공동체요, 사랑과 돌봄의 공동체였습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나누신 마지막 만찬을 현재화하며 빵을 떼는 거룩한 친교가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초대 교회 공동체는 성령의 역사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신비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함께 한 믿음의 공동생활을 묵상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깊은 신앙의 지혜와 사랑의 마음이 찾아 오길 기원합니다.
기도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베드로의 메시지를 들으며, 우리의 생각과 정신을 너머 걸어 올라 예수님의 지혜와 생각에 이르는 길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말하며,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에게 회개, 곧 그들의 정신을 너머 예수님께 갈 것을 촉구했던 베드로의 음성 속에서, 우리가 살아갈 <오늘의 길>을 찾게 하옵소서. 또한 성령의 역사 속에 함께 삶을 나누며 공동의 삶을 살았던 초대 교회 공동체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성령께서 이끄시는 나눔과 돌봄과 포용의 삶을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옵소서.”
화요일 (4/18)
하나님께서는 이 그리스도를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미리 아셨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내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에게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영혼을 정결하게 하여서 꾸밈없이 서로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은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썩을 씨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 곧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복음으로 전해진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1:20-24)
묵상
예수님의 참모습을 보게된 베드로는 진리의 대변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에게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그의 설명이 의미심장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셨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신 구원의 증거이기에, 우리는 이로 인해 하나님의 모습을 만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의 눈에 한 때 보이지 않았던 구원의 진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함으로써 그에게 선명히 드러났고, 베드로는 주님의 부활에서 영원의 광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거룩한 인생의 신비를 전하고 증거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고, 이제 만인 앞에서 두려움 없이, 확신에 거하며, 세상을 하나님의 빛으로 밝혀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우리에게 전하는 신앙의 권면에 오늘 아침 우리가 귀를 기울이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영혼을 정결하게 하여서 꾸밈없이 서로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은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썩을 씨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 곧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 속에서 진리를 깨우친 사람은 누구나가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진리가 사랑의 신비 속에 구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이고, 용서이고, 자비였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사랑 속에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 그리고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순결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뜨겁게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은 그에 따르면,. 세상 가운데 <다시 태어난 사람>인 것입니다. 베드로의 메시지를 이틀 동안 들으며 이번 한 주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믿음의 증언 속에 담긴 진리의 힘을 느끼며, 그의 말처럼, 뜨겁게 서로 서로 사랑하고, 사랑 가운데 다시 태어난 사람되어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기도
“구원과 사랑의 주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며 눈밝은 믿음의 안내자가 된 베드로의 메시지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순결한 마음으로 사랑하라고 권면하며, 우리가 나누는 뜨거운 사랑이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한다는 그가 전하는 믿음의 지혜로 우리의 마음의 자세, 그리고 삶의 자세를 다듬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 또한 베드로처럼 눈밝은 안내자가 되어, 세상 길에서 길잃고 방황하는 긍휼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안내하게 하옵소서.”
월요일 (4/17)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신을 차려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받을 은혜를 끝까지 바라고 있으십시오. 순종하는 자녀로서 여러분은 전에 모르고 좇았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불러주신 그 거룩하신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십시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여러분이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으니, 여러분은 나그네 삶을 사는 동안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여러분의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그것은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13-25)
묵상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말합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십시오. 그들에게 스스로 무게를 갖게 하십시오. 그들이 날아오르든 떨어지든 그대로 두십시오. 단 하나의 사물이라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 성공한다면, 비록 그것이 나무에 매달린 얼어붙은 사과 한 개에 불과하더라도 얼마나 대단한 성과입니까! 나는 그것이 어슴푸레한 우주를 밝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막대한 부를 우리는 발견한 것입니까? 우리가 열린 눈을 가질 때, 우리 시야가 자유로울 때, 신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글을 읽으며 베드로의 모습을 떠 올려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제자들 중 누구보다 먼저 만났고, 예수님의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 보았던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 곁에 그렇게 가까이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보고 싶은대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여 예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소로우는 ‘단 하나의 사물이라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데 성공한다면, 비록 그것이 나무에 얼어붙은 사과 한 개에 불과하더라도 대단한 성과’라고 말합니다. 그의 지혜를 빌려 생각해 본다면, 베드로에게는 바로 이러한 <사물과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데 실패>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은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어야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삶에 일어난 거룩한 변화는, 한 때 눈이 어두웠던 그가,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보면서, 그리고 부활의 예수님을 보면서, 마침내 <눈밝은 안내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오늘 묵상하는 베드로전서에서 ‘눈밝은 안내자’ 베드로는 우리에게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신을 차리라고 힘주어 말하며, 이렇게 권면합니다. ‘순종하는 자녀로서 여러분은 전에 모르고 좇았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불러주신 그 거룩하신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십시오.’ 자신 또한 한 때 욕망을 따라 살았지만, 그의 시야가 열려 이제는 불러주신 분의 뜻을 따라 살고 있었습니다. 그 뜻은 <거룩한 삶>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전통 안에서 거룩한 삶은 구별된 삶을 뜻합니다. 구별된 삶은 구별된 눈을 갖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갖고 살아가는 세속적 렌즈가 아닌 ‘하나님의 마음’을 삶의 렌즈로 지니고 살아가는 삶이 거룩한 삶입니다. 그 렌즈로 삶을 바라보며 베드로는 오늘 우리에게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말 것’과 ‘나그네 삶을 사는 동안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강조합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의 혜안이 열려서 사람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삶의 순례길 위에서 두려움과 떨림을 갖고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기도
“구원과 사랑의 주님, 한 주를 새롭게 걸어가는 아침에 베드로의 신앙적 권면에 귀를 기울이며, 예수님을 계신 그대로, 그리고 살아가신 모습 그대로 바라보며 살아갈 것을 소망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맑은 렌즈를 갖고 세상을 살아가도록 도우셔서, 세상 속에서 살아갈 바르고 선한 길을 안내하는 <눈밝은 안내자>가 우리 모두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