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은총이 예배의 자리에 함께 하신 여러분 모두 위에 임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아침입니다. 우리에게 <사순절>이라는 영적 훈련과 순례의 시간이 끝나며, 오늘 주님께서 부활하신 아침이 열렸습니다. 우리 삶에 보통 날씨와 관련해서 <어제>와 <오늘>의 차이는 크지 않습니다. 어제 비가 오고, 오늘은 햇빛이 환하게 세상을 비출 수 있겠죠? 어제 기온과 오늘 기온이 20 도 이상 차이가 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 계절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보통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날씨의 변화와 다르게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 차이가 확연히 클 때가 있습니다. 어둠과 빛, 죽음과 생명, 슬픔과 기쁨, 두려움과 평안… 이러한 우리 삶을 특징짓는 삶의 요소들이 <어제와 오늘> 사이의 짧은 시간 동안 한꺼번에 우리를 찾아 온다면, 우리는 그 급격한 변화를 받아 들이고, 그 흐름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힘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는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로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신앙인들에게 지난 몇 일 동안은 어제와 다른 오늘, 그리고 오늘과 다른 내일을 경험하며, 흔들리는 삶의 중심을 잡기 위해 애써왔던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셨던 그 밤의 다음 날,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셨습니다. 어제까지 함께 식탁을 나누셨던 스승의 죽음 앞에 제자들은 말할 수 없이 흔들렸습니다. 흔들려도 중심을 잃지 말아야 했겠지만, 그 흔들림은 땅과 하늘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것이었기에, 주님의 제자들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식사를 하던 어제’는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신 주님을 바라보는 오늘’과 달랐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성토요일)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어 죽음의 시간 안에 머물고 계신 날입니다. 이 날은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셨던 예수님께서 죽음의 시간 속에 머물고 계셨던 날입니다. 어두운 날이고, 슬픈 날이고,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의 삶이 좌절의 늪에 빠져 있던 날입니다. 또 다른 의미에서의 <어제와 다른 오늘>이 주님을 따르던 모든 사람들 앞에 찾아온 날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재 가운데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이렇게 ‘슬픔과 어둠과 정적이 흐르던 날’ 다음 날, <참으로 어제와 다른 오늘>이 찾아 왔습니다. 무덤 안에서 죽음의 시간에 머물고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시간을 벗어나 생명의 빛으로 새로운 아침을 열어 주신 날입니다. 가장 폭력적이고 잔인한 과정을 겪으시며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떨쳐내시며 부활의 첫 열매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신 날이 오늘입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함께 한없이 흔들리던 주님의 제자들의 삶의 중심을 <부활 생명>이라는 새로운 중심에 연결지어 주신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제와 다른 오늘>입니다. <부활>이라는 생명의 거룩한 신비가 세상 가운데 선포된 잘이 오늘이고,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 물리적이고 정치적인 힘에 있지 않고, 생명의 신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있음을 드러낸 날이 바로 오늘인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 그래서 우리 모두는 ‘죽임의 도구인 십자가’를 ‘살림의 도구’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장로교 목사인 프레드릭 부크너(Frederick Buechner)는 말합니다. “부활은 최악의 일(the worst thing)이 결코 최후의 일(the last thing)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의 말대로,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이 결코 ‘최후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줍니다. 인간의 세상에서 ‘힘이 곧 ‘정의’처럼 보이고, ‘악이 승리자’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이 진실된 힘이고 무엇이 참된 의의 길인지 보여 주고, ‘주님의 부활’은 어떻게 참 생명의 아침이 우리 향해 밝아오는지 보여 주고, 무엇이 세상을 움직이는 참된 힘인지를 알려 줍니다.
부활의 아침에 우리가 묵상하는 복음서 말씀에서 복음서 저자 마태는 주님께서 머무시던 무덤에서 일어난 일을 이렇게 전합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이레의 첫 날 동틀 무렵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주님의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에 다가와서, 그 돌을 굴려 내고, 그 돌 위에 앉았다. 그 천사의 모습은 번개와 같았고, 그의 옷은 눈과 같이 희었다. 지키던 사람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서 떨었고,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After the Sabbath, as the first day of the week was dawning, Mary Magdalene and the other Mary went to see the tomb. And suddenly there was a great earthquake, for an angel of the Lord, descending from heaven, came and rolled back the stone and sat on it. His appearance was like lightning and his clothing white as snow. For fear of him the guards shook and became like dead men.(NRSV)” (마태복음 28:1-4) 주님께서 죽음의 시간 안에 머무시던 아침,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은 주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밤새 흐느껴 울다가 동트는 아침을 맞이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른 아침, 그들이 예수님께서 누워계신 무덤을 찾았던 이유도, 무엇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만 주님의 무덤을 찾는 것 말고는 달리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동트자 마자 예수님 무덤 곁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뜻밖에 놀라운 사건의 목격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누워계셨던 곳에 큰 지진이 일어났고,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무덤 문을 단단히 막고 있던 돌을 옮겨 놓은 것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무덤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은 그 모든 사건 가운데서 무서움을 느끼고 떨고 있었습니다. 천지를 흔드는 초자연적인 사건을 경험하고 있으니 그들의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더우기 그들이 지키고 있었던 무덤은 십자가 형을 받고 처형된 예수의 무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느꼈을 두려움은 극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그들이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죽었던 예수는 살아나고 살아있던 경비병들은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 아마도 마태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여인들 앞에 나타난 천사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찾는 줄 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그는 살아나셨다. 와서 그가 누워 계시던 곳을 보아라. But the angel said to the women, “Do not be afraid, for I know that you are looking for Jesus who was crucified. He is not here, for he has been raised, as he said. Come, see the place where he lay. (NRSV)” (마태복음 28:5-6) 여인들의 두려움은 무덤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의 두려움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경비병들의 두려움은 <공포로 인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반면, 여인들의 두려움은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 앞에 설 때의 두려움이었습니다. 그것은 신적 존재 앞에 설 때 피조물인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경외심에 기초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은 흔들림의 일종이었지만, 여인들은 공포심에 흔들렸던 것이 아니라, 경외심에 흔들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두려움과 경외심 속에 흔들리는 여인들에게 천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살아 나셨고 더 이상 무덤 안에 계시지 않다’고 알려 줍니다. 그리고, 여인들에게 ‘빨리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라고 전하라’고 알려 줍니다.
천사의 말을 다 듣자 여인들은 두려움과 기쁨이 엇갈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생명의 신비 앞에 두려웠지만,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에 기뻤습니다. 아직 일어나고 있는 일의 전체를 보거나, 그 의미의 전부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죽음의 시간 안에 더 이상 머물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인하며 말할 수 없이 기뻤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뛸듯이 기뻐하며 제자들을 찾아 달려 갔고, 가던 길 위에서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님과 마주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평안하냐? Greetings!”하고,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지금까지 평안하지 않았던 여인들에게 건네시는 예수님의 인사가 의미심장합니다. 지금까지 평안하지 않았으나, 예수님을 만난 순간 슬픔과 혼돈과 아픔이 지워지지며 여인들에게 평안이 찾아 왔을 것입니다. <평안의 이유>가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안하냐?>고 예수님이 물으실 때, 그제서야, 평안이 그들에게 찾아 왔을 것입니다. 여인들은 ‘평안의 인사’를 건네시는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예수님께 절을 했습니다. 그들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말해 주는 대목입니다. 여인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그들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말해 줌과 동시에, 그들의 좌절과 절망과 슬픔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어제까지의 절망>이 얼마나 깊었고, <오늘의 감격과 기쁨>의 얼마나 컸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에게 중요한 말씀을 전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 Do not be afraid; go and tell my brothers and sisters to go to Galilee; there they will see me. (NRSV)” (마태복음 28:10)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나의 형제들>이라고 지칭하십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예수님 곁에 있던 제자들의 대부분이 십자가 형을 선고받으시고,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던 예수님 곁에 동행하지 못했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따르고,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으며 따랐지만, 정작 예수님과 함께 있었어야 했을 그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고, 예수님을 등지고 배반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나의 형제들>이라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났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한 순간도 떠나시지 않았음을 알려 주는 대목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음을 알려 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나의 형제들>이라는 표현 속에는, 그래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힘>이고, <자비의 힘>이고, <용서의 힘>이고, <포용의 힘>입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물리적인 힘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생명을 살려내는 힘>에 있고, <생명을 품고, 키워내는 힘>에 있으며, <죽음을 이기고, 어둠을 이기고, 절망을 이기는 힘>에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러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자매,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는 사순절의 여정을 거쳐 주님께서 부활하신 부활의 아침에 이르렀습니다. 이 아침은, 어제와 다른 오늘이고, 죽음의 어둠이 부활의 빛에 의해 사라진 날이며, 예수님께서 누워 계셨던 무덤 문이 열리고, 생명의 신비가 세상 곳곳으로 퍼져 나가게 된 날입니다. 신약 성서 학자 마커스 보그(Marcus Borg)는 그의 책, <놀라움과 경외의 나날들 Days of Awe and Wonder>에서 사순절에서 부활절에 이르는 여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순절의 여정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즉 시작과 끝이 있는 곳, 죽음과 부활이 있는 곳까지 예수와 동행하는 여정이다. 오래된 언어유희로 표현하자면, 예루살렘은 ‘무덤(tomb)’이 ‘자궁 (womb)’이 된 곳이다.” 그의 말처럼, 우리가 걸어온 사순절에서 부활의 아침에 이르는 여정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입니다. 그 여정 속에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하나의 끝을 경험했고, 부활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경험했습니다. 그 여정 속에서는 우리는 죽음을 맞으신 주님께서 누워계셨던 무덤을 경험했고, 그 무덤으로부터 새생명이 열리는 아침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제자들을 <나의 형제들>이라고 부르시는 <용서와 자비와 포용의 사랑> 앞에 서 있습니다. 그 ‘사랑의 힘’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비롯됨을 아는 우리는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비를 세상에 전할 소명 가운데 서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부활의 아침, 어떤 사랑의 힘을 마음에 새기고, 어떤 사랑의 힘을 세상과 사람 가운데 전할 수 있을까요?
사순절의 시작에 소개했던 독일의 바이올린 만드는 사람 ‘마틴 슐레스케 (Martin Schleske)’ 가 그의 책 <가문비 나무의 노래 The Song of Norway Spruce> 에서 말합니다. “작도하듯 그어진 완벽한 직선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간, 우리가 지닌 가능성, 우리가 겪는 상황…. 이 모든 것은 천천히 나선형으로 자랍니다. 구부러진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일을 직선 긋듯이 똑바로, 쉽게 직통으로, 똑떨어지게 하려는 마음은 하나님과 마찰을 빚습니다.” 사순절의 여정 속에서 우리가 경험한 <사랑의 힘>은 <직선이 아닌, 구부러진 결>을 갖고 있는 우리의 삶을 포용하고, 다듬고, 일으켜 세워 주는 <사랑의 힘>입니다. 주님의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구부러진 결이 아닌, 곧고 흐트러지지 않은 삶의 결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삶의 시간, 우리가 추구해 온 삶의 가능성, 그리고 우리가 겪어 온 삶의 상황 가운데, 우리는 직선의 삶, 혹은 직선의 시간을 살아오지 못했습니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며, 연약함과 부족함 가운데, 주님의 마음과 어긋난 삶을 살아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늘 이 아침, <평안하냐?>하고 인사를 건네시며, 우리를 <나의 형제들, 나의 자매들, 나의 친구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이 음성에는 우리 삶의 구부러진 결을 있는 그대로 품으시는 사랑의 힘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음성에는 우리가 세상에 전할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실체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 모두, 세상을 움직이는 이 ‘사랑의 힘과 신비’를 전하는 부활의 증인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 끝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맞으셨지만, 무덤이 놓여 있던 예루살렘으로부터 부활의 신비가 잉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신비 속에서 우리를 포함한 주님의 모든 제자들은 주님의 변함없고 깊은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