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각자의 자리에서 5분간 말씀을 묵상하고,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마칩니다
월요일 (4/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을 갖게 해 주셨으며,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물려받게 하셨습니다. 이 유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잠시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3-9)
묵상
부활절 후 첫 날 아침 우리는 베드로의 모습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그는 예수님의 첫 제자였고, 예수님의 공생애 내내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과 함께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그는 급박하게 밀려 오는 예수님을 향한 위협과 위험에 겁을 먹고 도망했고,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과 십자가 죽음의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예수님께서 자신을 필요로 하실 때 그 곁에 함께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의 죄책감과 슬픔을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가 힘껏 걸어 왔던 삶의 길이 혼돈과 어둠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그의 삶 가운데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 명령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삶을 일으켜 세워 주시는 주님의 손을 느꼈을 것입니다. 주님의 양을 먹일 자격이 없다고 여겼을 그가, 자격 없는 자에게 자격을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느꼈을 때, 그 감격과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그는 자신의 삶이 향할 바른 방향을 찾았습니다. 예수님과 참된 동행의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묵상하는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을 갖게 해 주셨으며,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물려받게 하셨습니다. 이 유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이 우리 귀를 크게 울립니다. 베드로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크신 자비로 새로 태어나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신앙의 진리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어서 말합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산 소망을 갖게 되었고,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물려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변화가 놀랍습니다. 겁장이에서 담대한 선포자가 되어 우리 앞에 베드로가 서 있습니다. 담대한 전도자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이 걸어갈 삶의 길을 일러 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잠시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십니다.” 자신 또한 삶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시련 속에서 슬픔을 겪고, 죄책감 속에서 눈물을 흘렸기에, 베드로는 그 모든 아픔과 슬픔이 믿음의 연단이었다고 고백하며, 우리에게 용기와 소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길 소망하는 이 아침, 베드로의 우렁찬 고백을 들으며, 우리 삶의 갈 길을 잘 다듬길 기원합니다.
기도
“구원과 사랑의 주님, 베드로의 담대한 음성을 들으며 부활절 후 첫 아침을 맞이합니다. 그의 확신에 찬 음성에서 믿음의 깊이가 느껴집니다. 주님, 실패와 시련을 겪으며 성장한 베드로처럼, 우리 또한 시련과 실패 가운데 쓰러지지 않게 하시고, 넘어졌던 땅을 딛고 일어서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자비하심 속에서 새로 태어난 기분이 들었던 베드로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의 자비하심 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옵소서.”
화요일 (4/11)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이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께서 기적과 놀라운 일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증명해 보이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 예수께서 버림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을 따라 미리 알고 계신 대로 된 일이지만, 여러분은 그를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습니다. 그가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그를 가리켜 말하기를 ‘나는 늘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보았다. 나를 흔들리지 않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은 기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체도 소망 속에 살 것이다. 주님께서 내 영혼을 지옥에 버리지 않으시며, 주님의 거룩한 분을 썩지 않게 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생명의 길을 알려 주셨으니, 주님의 앞에서 나에게 기쁨을 가득 채워 주실 것이다’ 하였습니다. 동포 여러분, 나는 조상 다윗에 대하여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서 묻혔고, 그 무덤이 이 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예언자이므로, 그의 후손 가운데서 한 사람을 그의 왕좌에 앉히시겠다고 하나님이 맹세하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내다보고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지옥에 버려지지 않았고, 그의 육체는 썩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일의 증인입니다. (사도행전 2:22-32)
묵상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며 인생의 큰 변화를 겪습니다. 인생이 깊은 어둠 속에 잠기는 것을 경험했으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경험하며 인생의 새빛을 얻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숨었던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며 담대히 부활하신 예수님과 복음의 신비, 그리고 구원의 신비를 선포합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변화를 보며 우리는 어떤 믿음의 교훈을 얻게 되나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은 예수님께서 다듬어가신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주체가 아니라, 따르던 제자들을 이끌어가신 예수님께서 주체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예수님께서 은혜와 사랑의 손길로 다듬고 이끌어 주신 결과입니다. 그가 사람들 가운데 외칩니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이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께서 기적과 놀라운 일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증명해 보이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베드로의 확신에 찬 얼굴이 눈에 그려지는 대목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은총과 신비에 대해 계속 증거합니다.
그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무법자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의해 죽임 당하신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에 근거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습니다. 그가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맞으셨으나, 무덤에 계속 머물러 계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살리셨다는 것, 이것이 베드로 자신의 동족들에게 힘주어 전한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베드로의 성장과 변화를 목격하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해 이루시는 큰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다듬어진 주님의 참 제자요, 부활의 산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 속에 우리 자신을 향한 소망과 비전을 발견하는 하루가 되길 기원합니다.
기도
“구원과 사랑의 주님, 담대히 자신의 동포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증거하는 베드로를 보며 그의 이전 모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제자로서의 그의 삶이 변화와 성장을 맞이했던 것은 은총 가운데 그를 품어 주시고, 다듬어 주시고, 성장을 도우셨던 주님으로 인함이었습니다. 주님, 그를 다듬어 주신 손길로 우리의 인생을 다듬어 주옵소서. 우리도 그와 다를 바 없이, 겁 많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오니,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와 사랑과 인내의 손길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소서.”
수요일 (4/12)
아, 주님, 주님이야말로 내가 받을 유산의 몫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복을 내려주십니다. 나의 미래는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줄로 재어서 나에게 주신 그 땅은 기름진 곳입니다. 참으로 나는, 빛나는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주님께서 날마다 좋은 생각을 주시며, 밤마다 나의 마음에 교훈을 주시니,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는 분,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주님, 참 감사합니다. 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고, 이 몸도 아무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은, 주님께서 나를 보호하셔서 죽음의 세력이 나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실 것이며 주님의 거룩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몸소 생명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니,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에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이 큰 즐거움이 영원토록 이어질 것입니다. (시편 16:5-11)
묵상
우리 인생에 떨림과 감격을 갖고 사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떨림과 감격은 우리가 <살아있음>을 알려 주는 지표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겨울을 지내고 봄을 맞이한 땅 위에서 파릇 파릇 새싹이 돋는 것을 보고 아무런 감흥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집 앞 뜰과 뒷 마당을 수놓을 개나리와 진달래, 수선화와 튤립을 보며 아무런 떨림도 감동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오월의 푸른하늘을 보고, 여름의 청명한 숲을 보고, 가을의 눈부신 단풍숲을 보고 우리 마음에 아무런 물결도 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그와 같이 우리가 살고 있다면, 우리 삶이 무미건조함에 빠져 있거나, 과한 피로와 아픈 마음으로 인해 지치고, 상한 영혼으로 우리가 살고 있음을 알려 주는 신호들일 것입니다.
오늘의 시편에서 우리는 감격에 찬 목소리로 주님께 기쁨과 신뢰를 표현하는 한 시인을 만납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아, 주님, 주님이야말로 내가 받을 유산의 몫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복을 내려주십니다. 나의 미래는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줄로 재어서 나에게 주신 그 땅은 기름진 곳입니다. 참으로 나는, 빛나는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주님께서 날마다 좋은 생각을 주시며, 밤마다 나의 마음에 교훈을 주시니,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시인의 기쁨과 감격은 <주님과의 관계>에 기초한 것입니다. 시인은 주님께서 받을 유산이 몫이 되시고, 필요한 모든 복을 내려 주심에 감격합니다. 미래를 책임져 주시는 주님을 찬양하고, 매일 매일 좋은 생각으로 우리의 지혜를 더해 주시고, 마음에 교훈을 채워 주시는 주님을 또한 찬양합니다.
우리는 “주님은 나의 기쁨”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감격을 마주하며 어떤 마음을 갖게 되나요? 그의 기쁨에 찬 얼굴이 눈 앞에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의 마음의 떨림이 느껴지지 않나요? 삶의 기쁨과 떨림은 그 사람이 <살아 있음>을 알려 주는 지표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기쁨이신 주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그 은혜와 사랑과 보살피심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힘차게 <살아있는> 사람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는 분,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시인의 힘찬 믿음의 고백을 우리 마음 속에 새기며, <주님을 기뻐하는 떨림과 감격>으로 오늘을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기도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시편의 시인이 고백하는 감사와 고백의 찬양을 들으며, 우리 삶에 어떤 떨림과 감격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 시인처럼, 주님을 기뻐하는 감격과 떨림으로 날마다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 몫의 유산이시며, 우리에게 좋은 생각과 바른 교훈을 채워 주시는 주님, 우리 삶이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 있음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주님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 위에서 한껏 감격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목요일 (4/13)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 20: 19-23)
묵상
지난 주일 예배 때 나누었던 것과 같이, 우리가 지나온 사순절의 여정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예수님의 여정과 동행하는 여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바와 같이, 여러번에 걸쳐 예루살렘에서 벌어질 자신의 임박한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했습니다. ‘인자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 사흘 뒤에 살아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예고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죽음과 부활의 길을 가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순절의 여정은 이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의 여정에 함께 하는 것이었고, 죽음을 넘어 부활의 삶에 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언급한 신약성서 학자 마커스 보그는 <놀라움과 경외의 나나들>에서 말합니다. “사순절은 낡은 정체성, 즉 문화, 전통, 또한 어쩌면 부모에 의해 주어진 정체성에 대해서 죽고 새로운 정체성, 즉 하나님의 성령 안에 중심을 둔 정체성에로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낡은 존재방식에 대해서는 죽고 또한 새로운 존재장식에로, 즉 하나님 안에 다시 한 번 자신의 중심을 두는 존재방식에로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176) 바꿔 말하면, 사순절은 우리 자신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를 향해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욕망에 기초한 삶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께서 세워주신 삶의 가치와 열망을 향해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첫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이 여정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선로를 이탈한 열차와 같이, 예수님의 삶,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부터 이탈해서, 길을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탈이 그들의 삶의 최종결말이 아니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의 형제들>이라고 칭하던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그러한 예수님의 사랑과 부활의 신비 속에서 다시 태어납니다. 오늘 묵상하는 요한복음 말씀은 자기 자신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를 향해 다시 태어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무서워서 숨어 있던 제자들이 바깥을 향해 닫아버린 문은 그들 삶의 현주소를 말해 줍니다. 더 이상 나갈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Dead End)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잠긴 문을 통과해서 예수님께서 들어 오셨고, 문 안으로 들어오신 예수님은 평화의 인사를 전하셨습니다. 지난 주일에 여인들에게 나타나셔서 <평안하냐?> 고 물으셨던 장면을 연상시키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시고, 그들에게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며, 고난의 흔적, 죽음의 흔적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령의 숨결을 불어 넣어 주시며, 새로운 숨결을 마시며 살게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부활의 숨결을 마신 새로운 존재, 부활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존재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다시 태어났듯, 우리 또한 예수님의 부활의 숨결을 마시며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오늘 우리의 묵상의 자리에 펼쳐진 부활의 숨결을 불어넣으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 우리에게 또한 같은 숨결을 불어넣어 주시는 주님을 만나길 소망합니다.
기도
“생명의 주님, 문을 닫아 걸고 두려움 속에 있던 제자들 앞에 부활의 주님께서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시며, 부활의 숨결을 넣어 주셨습니다. 같은 숨결로 오늘 우리 자리에 찾아 오사, 우리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어 주셔서, 주님 주신 숨결로 세상과 사람들을 축복하게 하옵소서”
금요일 (4/14)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을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다른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여자여, 왜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그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부니!” 하고 불렀다. (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 (요한복음 20: 11-18)
묵상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무덤을 찾은 마리아는 무덤 안에 예수께서 계시지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생각했고, 한없이 깊은 슬픔에 잠깁니다. 오늘 묵상하는 요한복음의 시작에 무덤 앞에 서서 마리아가 울고 있었던 것은 유일하게 예수님을 기억할 수 있는 장소가 누군가에 의해 침범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빈 무덤이 사실은 부활의 증거였지만, 마리아를 포함한 누구도 아직 빈무덤이 부활의 신호였음을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슬픔은 헤아릴 수 없이 깊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때 무덤 속을 들여다 본 마리아는 무덤 안에서 흰 옷을 입은 두 천사를 발견합니다. 울고 있던 마리아를 본 천사들은 그에게 ‘왜 우느냐?’고 물었고, 누군가가 주님을 가져갔다고 마리아가 대답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고도 그가 예수님이신줄 알지 못했습니다. 마음의 눈이 열려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는 왜 우는지 물으셨고, 그는 여전히 말을 건네는 분이 예수님이신지 알아 보지 못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마침내 그의 이름을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순간,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 곧 호명 행위는 그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신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이라야!’하고 그를 호명하셨을 때, 예수님의 음성은 그의 마음을 울렸고, 마음의 울림은 그의 눈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의 마음 속으로 맞아 들입니다. 우리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살아가길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열림>입니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생명의 신비로 우리 삶을 찾아 오실 때, 우리 안에 이루어져야 할 것은 <마음과 영혼의 깨어남>입니다. 봄의 새싹이 우리 삶의 뜰, 이곳 저곳을 수놓고 있는 이 때,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이 우리 삶의 다양한 자리를 깨어나게 하시길 기원합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주님,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며 무덤을 찾았던 마리아가 빈 무덤을 발견하고 더 깊은 슬픔에 빠졌던 장면을 묵상했습니다. 그의 깊은 슬픔 앞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그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눈이 열려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 삶을 찾아 오시는 부활의 예수님을 열린 눈으로 응시하도록 도와 주셔셔, 기쁨과 감격 속에 부활의 주님의 산 증인이 되어 살아가게 하옵소서.”
토요일 (4/15)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표징도 많이 행하셨다.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20: 24-31)
묵상
유대 사람들이 두려워서 문을 닫아 걸고 있던 제자들을 부활의 주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말했을 때 그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도마는 지금 자신의 경험 안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들어와 있지 않기에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동료 제자들에게 부활 소식을 들었지만, 듣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 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자신의 ‘눈’으로 손에 남은 못자국을 보고, 자신의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자신의 ‘손’을 예수님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믿을 수 없겠다고 말합니다.
그 후 일주일 정도가 지났습니다.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고, 이번에는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듣고도 자신의 경험 안에서 증명된 것이 아니었기에 도마는 다른 제자들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같은 방 안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함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있던 방의 문은 여전히 잠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고,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말을 건네셨습니다. 이 순간 도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의 인사 속에 전해진 그 <음성>이 그의 귀를 울렸을 때, 그의 마음 또한 울렸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인사를 건네신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도마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여기서 우리는 도마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계셨던 예수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께 말씀드린 적이 없으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마음의 교감>이 도마의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답했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이 고백은 도마가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이나 옆구리의 상처를 손으로 확인하고 나온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직접 손으로 예수님의 몸에 남은 상처를 확인해야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겠다고 했던 그였지만, 자신의 마음을 이미 헤아리고 계셨던 예수님의 음성이 그의 마음을 울렸고, 그는 그 부활의 주님 앞에서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열린 마음 속으로 믿음이 찾아 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전하신 평화의 인사 속에 생명의 빛과 회복의 빛이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예수님의 음성 속에서 걸어갈 길을 찾고, 살아갈 힘을 얻고, 나아갈 방향을 찾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곁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는 우리에게도 같은 은혜와 기쁨이 채워지길 기원합니다.
기도
“구원의 주 하나님,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소식을 동료들에게 들었으나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 도마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그에게 인사를 건네시며, 그의 의심을 다독거려 주신 부활의 주님을 기억하며, 주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 속에 오늘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오늘도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나셔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시며,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우리 세상 살이를 도우시는 주님을 선명히 발견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