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기간 동안,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각자의 자리에서 5분간 말씀을 묵상하고,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마칩니다. 우리가 쌓아가는 묵상과 기도의 훈련 속에 십자가를 통해 부활의 아침에 이르는 거룩한 길이 펼쳐지길 기원합니다.
월요일 (2/27): “목소리를 크게 내어 힘껏 외쳐라. 주저하지 말아라. 너의 목소리를 나팔 소리처럼 높여서 나의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알리고,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려라. 그들이 마치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않는 민족이나 되듯이,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을 알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무엇이 공의로운 판단인가를 나에게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를 즐거워한다고 한다.” 주님께서 보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금식을 합니까? 주님께서 알아 주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행을 하겠습니까? 너희들이 금식하는 날, 너희 자신의 향락만을 찾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킨다. 너희가 다투고 싸우면서, 금식을 하는구나. 이렇게 못된 주먹질이나 하려고 금식을 하느냐? 너희의 목소리를 저 높은 곳에 들리게 할 생각이 있다면, 오늘과 같은 이런 금식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으며, 주님께서 너희를 기쁘게 반기실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사야 58:1-5)
*묵상: 사순절의 둘째 주간을 맞이합니다. <금식>은 몸의 훈련을 통해 마음과 영혼을 단련하는 것입니다. 오늘 묵상하는 이사야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통해 주시는 금식의 의미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행하는 금식이 그 사람의 ‘속사람’을 정화시키지 못하면 그 금식의 행위는 무의미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금식하는 날, 너희 자신의 향락만을 찾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킨다. 너희가 다투고 싸우면서, 금식을 하는구나. 이렇게 못된 주먹질이나 하려고 금식을 하느냐? 너희의 목소리를 저 높은 곳에 들리게 할 생각이 있다면, 오늘과 같은 이런 금식을 해서는 안 된다.”
겉으로는 주님께서 알아 주시길 바라는 금식을 행하면서, 속으로는 향락만을 찾고, 그 일꾼들에게는 무리한 일을 강요하는 것, 이것은 온전한 의미에서의 금식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금식은 몸의 욕구를 제어하며, 마음의 단련을 행하는 것인데, 금식을 행하면서 향락을 일삼는 것은 무의미한 금식일 수 밖에 없습니다. 더우기 금식은 행하면서 그 삶에서는 다투기를 멈추지 않고, 못된 주먹질을 그치지 않는다면, 아무리 열심히 금식의 훈련을 쌓아도 그 훈련은 그 사람의 품성에는 변화를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금식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물으십니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으며, 주님께서 너희를 기쁘게 반기실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사순절 둘째 주간에 들어서며 맞이하는 첫 날 아침입니다. 이사야 말씀을 통해 <금식의 의미>를 돌아보게 된 이 아침, 주님께서 기뻐하는 금식은 어떤 모습의 금식일까요? 그것은 몸의 훈련을 통해 삶의 훈련과 변화가 이루어지는 금식입니다. 내가 먹기를 멈추면서, 그 멈춤의 자리에 이웃의 삶이 스며들게 하는 것이 참금식이고, 내 욕망을 절제하여 타인의 필요를 돕는 것이 참금식이며, 겉으로만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 것이 아닌, 마음과 정성을 다해 회개를 행하고 머리 숙여 겸손히 주님의 뜻을 향해 삶의 창문을 활짝 여는 것, 이것이 참된 금식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걷는 하루의 여정 속에 몸의 훈련을 통한 마음과 영의 변화가 한걸음 한걸음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기도: “구원과 사랑의 주님, 한 주를 여는 그 시작에 금식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겉으로는 훈련의 삶을 살고자 하면서도, 정작 마음 깊은 곳, 영혼의 중심에서는 훈련을 게을리하고, 반성을 두려워했습니다. 주님, 이사야를 통해 바른 금식의 의미를 들려주신 그 음성을 들으며, 우리 선 자리를 참된 영적 훈련과 단련의 과정을 통해 아름답게 다듬어 가길 소원하오니, 이번 사순절의 시간을 통해 진실된 영적 변화와 성숙이 우리 삶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화요일 (2/28):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네 의를 드러내실 분이 네 앞에 가실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 그 때에 네가 주님을 부르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가 여기에 있다’ 하고 대답하실 것이다. 네가 너의 나라에서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을 없애 버린다면,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 너의 백성이 해묵은 폐허에서 성읍을 재건하며, 대대로 버려 두었던 기초를 다시 쌓을 것이다. 사람들은 너를 두고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 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사야 58:8-12)
*묵상: 어제 우리는 영적 훈련으로서의 금식의 의미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금식의 의미와 목적은 우리가 묵상한 바와 같이, 몸의 훈련을 통해 마음과 성품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된 마음과 삶의 자세로 이웃과 세상과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묵상하는 이사야 말씀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사야를 통해 듣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는 것은, 금식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위에서 드려지는 하나의 ‘영적 제사’이지만, 그 영적 훈련은 우리와 이웃과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곁에 부당한 이유로 결박되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방관하면서 금식을 할 경우 그것을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영적 제사로 보실까요? 하나님 앞에서 금식은 하면서 그 이웃은 압제당하고, 멍에를 짊어진 채 고통받고, 배고픔에 시달리고, 입을 것과 머물 곳 없어 아파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영적 제사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아침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순절에 들어서서 영적 훈련의 계절을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묵상하는 이사야 말씀은 <영적 훈련>과 <일상의 삶>에 괴리가 있어서는 안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영적 훈련은 우리 삶의 자세를 수정해 주고, 우리의 입과 언어를 순화시켜 주며,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맑게 닦아 줍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어지럽히는 폭력과 폭언, 그리고 행악들과 맞설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유로 인해 오늘 이 아침 우리 귓가에 이사야를 통해 그 음성을 들려 주십니다. “네가 너의 나라에서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을 없애 버린다면,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 우리가 쌓아가는 영적 훈련의 시간들이 우리 품성을 변화시키고, 우리 주위의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토대를 만들어 주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마음과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고,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키기 위해 할애한다면,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대로 우리 삶의 뼈마디에 원기가 채워지고, 우리 인생은 물 댄 동산 같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입니다.
*기도: “구원과 사랑의 주님, 우리 귓가에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우리가 정성을 쏟아야 할 삶의 지향점을 점검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영적 훈련들이 우리 삶의 자세를 다듬어 주고 정돈해 주어서, 우리 모두가 세상을 어지럽게 흔드는 폭력과 폭언과 미움과 욕심들을 척결하는데 마음과 정성을 쏟으며 살아가길 소망하고 결단하오니, 2023년 사순절의 순례길 위에서 인생의 좋은 전환점을 세울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삶의 뿌리가 우리의 영적 훈련을 통해 더욱 튼실해질 수 있도록 도와 주시고, <영적 훈련>과 <일상을 살아내는 힘>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짝을 이루어가며 매일 매일 성장과 성숙의 계단을 오르게 하옵소서.”
수요일 (3/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다섯이었다. (창세기 12:1-4)
*묵상: <누군가에게 복이 되는 복>, 이것이 아브람이 하나님께 얻은 복입니다. ‘아직 알지 못하던 신’ 야웨 하나님을 만난 아브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의 <질문>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직 ‘낯선 음성’인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새로운 인생의 문을 열고 나가는 모험을 감행할 용기가 있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입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아브람을 향한 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귓가에 처음 들렸을 때 아브람에게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우리는 보통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또는 ‘주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간 믿음의 표본’으로 생각합니다. 아마도 히브리서가 전해주는 아브라함의 이미지가 강렬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달리 말하면, <아브라함>이 아직 <아브람>이었을 때, 하나님의 <낯선 초대>로부터 인생의 새걸음을 옮겨갈 용기가 있는지 여부를 질문 받았던 것입니다. 아직 그에게 ‘알려지지 않은 신’ 야웨 하나님의 낯선 음성 속에서 그는 결코 낯설지 않은 터치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인생의 <새길>을 떠날 수 있었던 힘이었습니다. 당시 사회는 부족 중심 사회였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속한 부족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전쟁으로 인한 부족의 멸족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곳으로 이주해서 새로운 농지를 일구어야 하는 과제도 새로 생기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람의 모험과 용기는 불확실한 가능성을 끌어 안으며 생긴 것이기에, 그가 내딛게 된 삶의 발걸음이 의미있고, 신비로운 것입니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은 <큰 아버지>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후에 그를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호명하셨습니다. 그 뜻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시며 그의 인생을 <확장>시키신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 대로, 장차 <다른 사람의 인생을 복되게 하는 복>을 주는 사람으로까지 확장됩니다. 참으로 뜻깊은 인생의 길이 그에게 열린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순절의 <복된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아브람의 인생을 확장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묵상하는 오늘, 그가 하나님의 낯선 음성 속에 친밀한 터치를 느꼈듯, 하나님의 말씀의 신비가 우리 영혼을 감싸주시길 기원합니다. <누군가에게 복이 되는 복>이 우리에게도 열리길 소원합니다.
*기도: “구원과 사랑의 주님,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생의 새길을 떠난 아브람을 묵상했습니다. 불확실성을 끌어안고 인생의 모험을 감행한 아브람에게서 참된 용기를 배우는 이 아침, 우리 인생 가운데에서 새로운 모험의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실 때, 용기있게 그 모험에 나설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 인생의 지평을 넓혀 주시고, 우리 삶의 역량을 넓혀주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을 감사히 여기며, 주님의 초대에 신뢰함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도와 주옵소서.”
목요일 (3/2): 그러면 육신상으로 우리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그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 하였습니다.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을 은혜로 주는 것으로 치지 않고 당연한 보수로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비록 아무 공로가 없어도, 그의 믿음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로마서 4:1-5)
*묵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는 바울의 말은 우리에게 ‘믿음과 행위,’ 혹은 ‘믿음과 의로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믿음은 <행위>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믿음은 <능력> 또한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향해 신뢰 가운데 걸어 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결과는 보상도 아니고, 상급도 아니며, 믿음이 굳건하다고 누군가에게 뽐낼 일도 아닙니다. 바울은 이러한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고민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던 당시 유대교 사회에서는 율법의 중요성이 강조되며 종교적 <행위>가 종교적 <의>와 연관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종교적 컨텍스트 가운데 믿음과 의로움, 그리고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선명하게 정리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 의로움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의로움에 이르며, 우리가 믿음을 통해 이른 의로움은 믿음에 대한 보상이나 댓가나 상급이 아닌 아무 공로 없이 거저 얻는 은혜입니다.
바울은 믿음을 통해 의로움에 이른 예로 아브라함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얻었습니다. 그의 마음 중심에 자리 잡은 하나님을 믿음과 신뢰가 하나님께 아름답고 의롭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묵상하는 말씀에서 말합니다.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을 은혜로 주는 것으로 치지 않고 당연한 보수로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비록 아무 공로가 없어도, 그의 믿음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바울은 ‘경건한 사람’과 ‘의로운 사람’이 항상 연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율법적인 잣대에서 어느 사람이 경건해 보이더라도, 그가 자신의 경건함을 의로움과 연관지으며 자신의 경건함과 의로움을 뽐낸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바른 마음의 자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반응이기 때문에 그는 어긋안 믿음의 자세를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스스로가 경건함을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감사와 감격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믿음을 통해 의로움에 이른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일러주는 영적 교훈입니다. 우리의 사순절 여정에 바울의 교훈을 통한 뜻깊은 배움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기도: “구원과 사랑의 주님, 2023년 사순절의 봄을 걷고 있습니다. 겨울의 끝자락에 서서 맞이하는 봄을 향한 순례의 길인 사순절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깊어지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영적 자세가 다듬어지는 기쁨이 찾아오게 하옵소서. 오늘 하루, 믿음을 통해 이르게 되는 의로움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것인지 깊이 깨닫게 도와 주시고, 우리가 아무 공로 없어도 우리의 믿음이 의로움에 이르게 하는 참된 통로임을 선명히 깨닫게 하옵소서.”
금요일 (3/3):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따로 데리고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더불어 말을 나누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7:1-4)
*묵상: 종교를 뜻하는 영어 단어 ‘religion’은 ‘연결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라틴어인 ‘religare’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것은 종교가 갖고 있는 의미를 잘 설명해 주는 하나의 예입니다. 종교는 거룩함과 속됨, 영원과 시간, 무한과 유한, 이웃과 이웃, 세상과 세상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그 본질로하는 세상에 세워진 <다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일을 종교 공동체에 맡기시며, 세상의 이곳 저곳이 연결되고 유한한 세상과 무한한 영역이 서로 소통되길 소망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 혹은 교회는 ‘연결자’로서의 소명을 잘 감당하며 살아왔습니까? 혹시 연결되어 있는 것조차 둘로 쪼개며 대립시켜 온 것 것이 기독교 혹은 교회의 길은 아니었나요?
오늘 묵상하는 복음서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에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입으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 제자들은 아마도 마음으로 손뼉을 쳤을지 모릅니다. 자신들이 예수님 곁을 따라온 보람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곁에 서서 예수님 주위를 둘러싼 <광채>, 곧 <영광의 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 말을 나누었습니다. 지금껏 예수님을 따라온 것이 인생의 바른 선택이었다고 기뻐했을 순간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이러한 반응을 대하며 어떤 묵상을 하게 됩니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말을 환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꾸짖지는 않으셨지만, 그의 말에 동의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반응은 베드로의 말이 예수님의 마음에 염려를 일으켰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으로부터 광채가 나왔던 그 순간, 베드로가 무엇인가를 간과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복음서로 묵상의 아침을 여는 오늘, 우리는 오늘의 복음서 장면에서 어떤 영적 배움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영광의 빛이 내리는 높은 산에 계속 머물고 싶어했던 베드로는 지금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과 함께 씨름하는 우리의 <오늘> 위에 주님께서 지혜를 부어주시길 기원합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주님, 사순절이 시작된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영적 성숙을 소망하며 시작한 우리의 영적 순례 위에 주님께서 친밀히 동행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유한함을 지닌 존재들로 이 세상을 살아가며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늘 소통하길 소망하오니,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놓지 않고 영원하신 주님 곁을 걸어가게 하옵소서. 분열과 갈등과 반목을 반복하는 세상살이 가운데, 주님께서 이웃과 이웃, 세상과 세상을 연결하는 통로요, 다리로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귀한 뜻을 바로 깨닫고, 분열의 세상에 연결과 화합과 연합의 통로와 다리가 되도록 도와 주셔서, 주님 바라시는 세상의 모습을 일구며 살아갈 수 있게 하옵소서.”
토요일 (3/4): 베드로가 아직도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으며,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이 눈을 들어서 보니, 예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명하셨다.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그 광경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마태복음 17:5-9)
* 묵상: 어제 묵상에서 우리는 종교의 본질과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종교를 뜻하는 영어 단어 religion이 ‘연결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며, 종교의 본질이 나뉜 것을 연결하고, 흩어져 있는 것을 통합하는 것에 있다는 점을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높은 산에 오른 베드로는 영광의 광채 가운데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집을 짓고 함께 머물고 싶다고 말합니다. 영광의 빛이 밝게 빛나는 높은 산에서 내려오기 싫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가 아직 말을 하고 있던 그 때,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 자리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늘로부터 들려온 이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이를 깨달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두려워했습니다. 유한의 존재인 인간에게 무한의 존재이신 하나님의 목소리가 직접 들렸을 때, 먼저 찾아온 마음이 두려움이었던 것은 유한과 무한의 거리, 혹은 땅과 하늘의 거리를 인지하고 사는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반응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그 음성을 따라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막연히 안고 있었던 두려움을 잠재워주시려 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눈을 들어서 보니, 에수님 밖에는 아무도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 모세도, 엘리야도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을 따라서 산으로 내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함께 내려 오던 제자들에게 명하십니다.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그 광경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예수님께서는 산 위와 산 아래를 연결하는 사명 가운데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땅과 하늘을 연결해 주시고, 이 곳과 저 곳을 소통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런 소명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산 위에 오르셨고,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과 산 위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자들은 예수님 주위를 비추는 빛을 보았고, 베드로는 그 빛에 매료되어 예수님을 위한 집을 짓고 산 위에 머물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시며, 그들에게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 살아날 때까지는 보았던 것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제자들은 산 아래로 내려와 산 아래의 세계, 혹은 산 아래 놓인 땅을 걷고, 살아가며, 그들이 잠시 보았던 산 위에서의 그 아름다운 빛과 혼돈과 어둠 가운데 놓인 세상을 연결하는 소명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을 걸어야 할 예수의 제자들이 마음 속에 기억할 하늘의 빛을 선물하셨고, 제자들은 자신의 마음 속에 담겨진 하늘의 빛과 땅의 세상을 연결지을 부르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순절의 두번째 주일을 앞둔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며, 하늘과 땅을 연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따라, 땅과 하늘을 잇는 사람들로 부름 받은 제자들의 소명을 생각해 봅니다. 그들의 소명이 곧 우리의 소명이기에, 우리는 우리가 부름받은 소명의 자리에서 오늘 어떤 묵상으로 하나님께 친밀히 다가설 수 있을까요? 우리의 묵상 가운데 주님의 지혜가 우리 영혼 안에 스며들길 기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총의 주님, 땅과 하늘, 사람과 사람, 세상과 세상을 잇는 연결자로서의 소명을 얻고 우리가 이 땅을 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을 따라 높은 산에 오른 제자들이 산 위에서 맞이한 광채에 매료되어 산 위에 마냥 머물고자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흔들어 깨워서 산 아래로 함께 내려 가셨습니다. 주님, 우리 또한 그 제자들과 같이 땅과 하늘을 잇는 사명을 선명히 깨닫지 못할 때, 우리의 어리석음을 다듬어 주시고, 우리의 무지를 주님의 지혜의 빛으로 밝혀 주옵소서. 사순절의 시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성숙의 기회도 함께 깊어지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