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각자의 자리에서 5분간 말씀을 묵상하고,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마칩니다.
월요일 (7/11): 주님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한창 더운 대낮에, 아브라함은 자기의 장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보니, 웬 사람 셋이 자기의 맞은쪽에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장막 어귀에서 달려나가서, 그들을 맞이하며, 땅에 엎드려서 절을 하였다.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손님들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이 종의 곁을 그냥 지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을 좀 가져 오라고 하셔서,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시기 바랍니다. 손님들께서 잡수실 것을, 제가 조금 가져 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에게로 오셨으니, 좀 잡수시고,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좋습니다. 정 그렇게 하라고 하시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창세기 18:1-5)
>>묵상: 아브라함이 어느날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주님을 맞이합니다. 그는 한창 더운 대낮에, 장막 어귀에 서 있었고, <사람 셋>이 자신의 맞은쪽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장막 어귀에서 달려나가서, 그들을 맞이하며,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반갑게 맞으며, 정성스럽게 대접합니다. 아브라함이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환대>가운데 맞이한 이 장면에서, 러시아의 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미지를 발견했습니다. 얼마전 주일 예배 시간에 소개한 <삼위일체>가 1410년, 창세기 18장에서 영감을 얻어 그가 완성한 성화입니다. 아브라함이 상수리 나무 곁에 있을 때 그를 찾아온 <셋>에서 루블료프는 성부, 성자 , 성령 삼위 하나님의 모습을 떠 올렸고, 그는 그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화폭에 담았습니다. 삼위의 하나님을 상징하는 세 사람은 식탁에 둘러 앉아 <세상의 폭력과 갈등이 침범할 수 없는 절대 사랑과 포용의 “삼각형”>을 만들어 냅니다. 그 삼각형 안에서 세상은 절대 평화와 순전한 포용을 경험합니다.

영성가 헨리 나우웬은 루블료프의 성화를 묵상하며, 삼위의 하나님께서 만들어내는 <삼각형의 공간>에서 들려오는 초대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우리도 세 거룩한 천사가 나누고 있는 친밀한 대화에 동참하라고, 그리고 식탁에 더불어 앉으라고 부드럽게 초대하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성자에게 몸을 기울이신 성부의 움직임과 성부께로 몸을 기울이신 성자와 성령 두 분의 움직임은 하나의 움직임을 이루게 되고, 기도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마음이 드높여지고 든든해진다.” 아브라함도 불현듯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맞이하며, 자신을 향해 다가온 <신비스런 초대>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나타난 낯선 <세 사람>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한없이 열리며, 발 씻을 물을 준비하고, 먹을 것을 정성스럽게 내어 주게 되는 신비스런 체험을 하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신비 속에 머물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편 묵상의 자리에서, “한 식탁에 둘러앉아” 따스한 시선 가운데 <절대 평화의 공간>을 만들어내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만나며, 평화와 사랑의 신비를 경험하길 기원합니다.
>>기도: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주님, 주님의 거룩한 손길 속에 사랑의 신비를 맛보고, 은혜의 단맛을 느끼며 살아가는 저희들이 아브라함이 경험한 하나님의 신비를 묵상했습니다. 낯선 세 사람을 만났지만, 주저함 없이 그 셋을 환대 가운데 맞이하며, 포용의 기쁨을 경험했던 아브라함처럼, 우리 삶에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으로 찾아 오셔서, 우리 삶의 식탁에 <사랑과 포용의 공간>을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화요일 (7/12): 아브라함이 장막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사라에게 말하였다.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지고 와서, 반죽을 하여 빵을 좀 구우시오.” 아브라함이 집짐승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서, 기름진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하인이 재빨리 그것을 잡아서 요리하였다.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만든 송아지 요리를 나그네들 앞에 차려 놓았다. 그들이 나무 아래에서 먹는 동안에, 아브라함은 서서, 시중을 들었다.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장막 안에 있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그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창세기 18:6-10a)
>> 묵상: 어느날 아브라함에게 낯선 <세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천사들>이었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보자, 자신의 장막으로부터 뛰어나가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정성스럽게 대접합니다. 그 만남의 신비 안에서 아브라함은 분명, 그 만남이 예사로운 만남이 아니었음을 짐작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집으로 반갑게 <하나님의 천사들>을 맞아 들인 아브라함은, 장막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아내 사라에게 손님 대접을 해야함을 알려 줍니다. 그가 아내 사라에게 말했습니다.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지고 와서, 반죽을 하여 빵을 좀 구우시오.” 여기서 ‘빵’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우가’는 일반적인 빵을 뜻하는 “레헴” 보다 더 귀하게 준비하는 돌에 구운 빵을 뜻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자신들에게 찾아온 ‘세 사람’을 어떤 마음 가짐으로 환영했는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평소 먹는 일반적인 빵(레헴) 보다 정성을 더 많이 기울이는 빵(우가)으로 하나님의 천사들을 대접하려 했던 것입니다. 사라에게 특별한 빵을 구울 것을 부탁하고 나서, 아브라함은 하인들로 하여금 좋은 송아지 한 마리로 요리를 하도록 하며, 손님을 접대할 식탁을 준비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다음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이 귀하게 마련한 식탁에서 음식을 나누던 자리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그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이로서 아브라함이 경험하고 있는 <만남의 신비>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왔던 것은 장차 그의 아내 사라에게서 아들이 나올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에게 열국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 아브라함과 사라가 맞이한 ‘천사의 방문’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과정을 짐작했을리 없습니다. 그는 다만 자신에게 찾아온 낯선 방문객들을 환대 가운데 맞아 들였고, 그의 환대 속에 주님께서는 그에게 장차 일어날 중요한 <인생 사건>, 곧 <아들의 출생>에 관해 일러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깨닫습니까? 고향 하란을 떠난 후, 아브라함에게 그의 인생길은 <내일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지금의 삶>이 늘 <길 위>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이끄심과 복된 약속> 가운데, 그의 <내일>은 소망의 창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그의 인생에 열려 있던 소망의 창 속으로 함께 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얻게 된 소망과 같이, 우리 인생 향해 열려 있는 소망의 창은 어디로부터 열려 있습니까? 믿음의 눈으로 그 소망의 창을 발견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 기도: “은혜로우신 주님, 주님께서 어느날, 아브라함에게 찾아 오셔서, 그가 장차 얻게 될 아들에 관해 알려 주셨습니다. 그 소식을 알려 주시려, 낯선 사람의 모습으로 그에게 나타나셨지만, 아브라함은 <낯선 사람을 향한 환대>의 <창>을 열고 주님을 맞이했습니다. 주님, 우리 마음에도 <따스한 환대의 창>이 늘 열려 있도록 도와 주시고, 그 환대의 문을 통과해서 우리 가슴에 내려 앉는 하나님의 신비를 누리며 세상길을 걷게 하옵소서.”
수요일 (7/13):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분은 교회라는 몸의 머리이십니다. 그는 근원이시며,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는 그분이 만물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는 그분이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골로새서 1:15-18)
>> 묵상: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가 <암흑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문 안에 들어서게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게 되었음을 강조한 바울은 오늘 묵상하는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도록 드러내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한 사람의 인간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시기에 예수께서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시고, 만물은, 따라서,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바울이 가르쳐 주는 ‘신비 가득한 이 신앙적 언어’는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터치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막 찾아 오셨으나, 이미 만물의 피조 전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셨다는 이 신비 가득한 신앙적 진술 속에서 우리 기독교는 이 땅에 존재하는 어느 종교적 울타리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범주 위에 오롯이 서 있습니다. 세상 가장 깊숙이 발을 내딛으셨으나, 그 세상에 얽매이지는 않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사도 바울의 말처럼 그리스도의 <인격과 신성의 조화와 신비>를 표현하는 것이 또 있을까요? 그가 말합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만물보다 먼저 계신 <초월자 예수님>께서는 만물로부터 떨어져 있는 ‘절대 타자’가 아니십니다. 그분은 만물을 초월하는 그 능력으로, 만물의 가장 깊은 자리에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세상 모든 존재의 디딤돌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분은 교회라는 몸의 머리이십니다. 그는 근원이시며,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는 그분이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 신앙적 진술 위에 든든히 서서, ‘교회라는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세상 위에 이루어 주신 <구원의 은혜와 신비>를 전하고, 증거할 사명과 기쁨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일꾼들입니다. 우리 모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과 신비를 세상 가운데 힘차게 전하며, ‘근원’을 모르거나, 망각하고 살아가는 이 땅 위의 사람들 앞에 <생명과 구원, 그리고 사랑의 빛>을 비추어 주길 기도합니다.
>> 기도: “구원과 은혜의 주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들의 세상’에 <영원으로 잇대어지는 통로>가 되어 주셨습니다. <피조물 가운데 오셨으나,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존재의 기반과 디딤돌로 삼아, 이 땅을 살아가며 <땅의 욕망>에 얽매이지 않고, <하늘 소망> 가운데 <자유의 사람들> 되어 살아가게 하옵소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를 우리 가운데 드러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눈빛과 얼굴빛을 마주하며, 땅 위에 있으나, <땅과 욕망의 인력>에 붙들려 살지 않도록,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목요일 기도(7/14):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안에 모든 충만함을 머무르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 전에 여러분은 악한 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고,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그분의 육신의 몸으로 여러분과 화해하셔서,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자기 앞에 내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에 튼튼히 터를 잡아 굳건히 서 있어야 하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소망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복음은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되었으며,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1:19-23)
>> 묵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는 ‘땅과 하늘,’ ‘사람과 하나님,’ ‘유한의 세상과 무한의 하늘 나라’ 사이에 <평화>와 <화해>의 다리를 놓기 위함이었습니다. 물질적인 욕망이 범람하는 땅은 유한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한한 욕망이 분출되고, 충돌하는 곳입니다. 유한의 존재가 무한의 욕망에 사로 잡힐 때 무한하신 하나님과 충돌을 하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욕망의 거대한 힘에 휩쓸려 질주할 때, 사람은 쉽게 죄의 파도에 휩싸이게 되고, 바울이 말하는 바, 그것은 ‘악한 일을 행하며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게 되는 것’이고,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욕망 그 자체>는 중립적인 것입니다. 무엇을 얻고자 하고, 무엇을 행하고자 하며, 무엇을 누리고자 하는 것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는 ‘과한 욕망’에 있습니다. 과한 욕망으로 인해 ‘타인의 삶’을 대상화하고, 사물화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시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모두,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말미암아 찾아온 <거룩한 하늘로부터의 선물>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그분의 육신의 몸으로 여러분과 화해하셔서,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자기 앞에 내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에 튼튼히 터를 잡아 굳건히 서 있어야 하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소망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이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모두를 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이전에는 ‘악한 일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었고,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죽으심’, 그리고 ‘육신의 몸으로 이루신 그리스도의 화해’를 통해,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새롭게 다듬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서 있게 된 <새로운 존재의 기반>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우리 모두 바울의 권면처럼, ‘믿음에 튼튼히 터를 잡아 굳건히 서’ 있으며, 우리에게 찾아온 <복음의 소망>에서 늘 떠나지 말고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화해와 평화의 다리>가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을 늘 놓지 말고, 갈등과 분열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 세상의 중심에 <평화의 메신저>가 되어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 기도: “구원과 은혜의 주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 힘입어, 우리 앞에 하나님께로 향하는 <화해의 계단>이 놓여지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거룩한 기쁨을 향유할 수 있는 <생명의 다리>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주님, ‘흠 많고 책망 받을 것 투성이’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음에 진실로 감사 드립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 위에 서서 얻은 이 구원의 기쁨과 행복에서 떠나지 말고, 세상과 사람 향해 복음의 소망을 공급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금요일 (7/15): 주님, 누가 주님의 장막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깨끗한 삶을 사는 사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 혀를 놀려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 사람, 친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를 경멸하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맹세한 것은 해가 되더라도 깨뜨리지 않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높은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않으며, 무죄한 사람을 해칠세라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15:1-5)
>> 묵상: 다윗은 ‘누가 하나님의 임재를 만나는 <주님의 장막> 에서 살 수 있겠냐’고 묻습니다. 또한 ‘누가 <주님의 거룩한 산>에 머물 수 있겠냐’고 묻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선다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의한 사람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믿음이었고, 다윗 또한 그런 신앙의 전통 곁에 서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 있도록 <허락된 사람>의 특징을 이렇게 열거합니다. “깨끗한 삶을 사는 사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 혀를 놀려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 사람, 친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를 경멸하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용납된 사람의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게 되는데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선하고 의로움을 지켜가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정의를 실천하고, 진실을 말하고, 남의 허물을 들추지 않고, 친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이웃을 모욕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경멸하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존경하는 것,’ 이 모두는 <공동체>를 전제로 하는 것들입니다. 타인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주님의 장막에 살고, 주님의 성산에 머물 수 있는 <척도>가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종교가 지니는 <근본적인 성격과 의미>를 알려 줍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독자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음과 동시에, <우리>로써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서로 서로에게 <이웃이 되어줄 소명>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근간을 이루는 신명기 6장 5절 말씀은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과 함께, 이웃을 또한 사랑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전통 위에 서서 그의 말을 이어갑니다. ”… 맹세한 것은 해가 되더라도 깨뜨리지 않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높은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않으며, 무죄한 사람을 해칠세라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높은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않아야 된다>는 항목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높은 이자를 요구함에도 돈을 꿀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매우 형편이 어렵고 인생이 궁지에 몰린 사람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질게 대하지 말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길에 이러한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약자를 향한 삶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오늘, 다윗의 시를 통해 묵상의 정원에 들어선 우리가, 그가 알려 주는 <타인과의 관계의 중요성>, 그리고 <타인을 사랑과 존경, 그리고 돌봄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의 귀중함>을 마음 깊이 새기며, <주님의 장막>에서 살 소망과 <주님의 거룩한 산>에 머물 기대를 키워가길 기도합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주님, 다윗의 시를 마음에 담고 기도의 문을 열며 주님 앞에 섰습니다. <주님의 장막>에서 살 수 있는 사람, <주님의 거룩한 산>에 거할 수 있는 사람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에서 <선함>과 <의로움>을 지켜가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약자를 마음 다해 돌보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일러주는 다윗의 믿음의 지혜를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게 도와 주십시오. 우리는 죄악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지만, 주님께서 함께 일구어 가라고 허락하신 <공동체의 삶>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고, 깨어지며’ 새로운 존재를 입어 가고 있음을 잊지 않게 도와 주옵소서.”
토요일 (7/16):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누가복음 10:38-42)
>> 묵상: <현재를 살아라!> 얼마 전 부터 제 <삶 곁>에 머물고 있는 문구입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오직 내게 선명한 시간은 <현재> 뿐입니다. 우리가 늘 궁금해 하는 ‘미래’는 ‘미래’를 향해 오지도, ‘과거’를 향해 오지도 않습니다. 오직 ‘현재’를 향해서만 올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라는 우리에게 가장 선명하고, 유일한 순간을 무심코 흘려 보내지 말고, 그 순간 순간에 마음과 뜻과 영혼과 정성을 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에 붙들려 살아가고, <기억>에 얽매여 살아갑니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늘 <내일>에 가 있습니다. 앞으로의 삶에 안정과 평안과 평화가 풍성히 채워지기를 소망하는 한편, 그런 미래를 맞이하지 못할까봐 우리는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며, 우리의 <오늘>과 <현재>에 ‘근심과 걱정의 두터운 외투’를 입히고 살아가곤 합니다. 이런 단상들을 떠 올리다가 마음 속에 찾아온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과연 한 순간이라도 <현재>를 충만하게 살아본 적이 있는가? 늘 <과거>를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아니면 오지 않은 <미래>를 대비한다고 마음을 늘 <내일>에 넘겨주고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아직 답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쓸만한 질문들’을 지니고 살아가게 된다면, <현재를 살아라!>는 삶을 향한 명령이 지시하는 삶의 실체에 조금씩 근접할 수 있게 되리라 희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누가복음서에서 두 여인을 만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입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한 집에 살고 있던 이 자매를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방문을 받은 두 여인은 각 자 다른 자리에서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언니 마르다는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여러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했습니다. 마르다는 ‘일하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에 집중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곁에 앉아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적잖이 마음이 상하게 된 마르다는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함께 거들며 일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마리아를 보며 마음이 상한 마르다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관심만을 쫓은 마리아를 향해 언니로서 할 수 있는 책망인 것이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의 답변이었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마르다는 지금,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오신 <현재>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르다의 지금 모습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가까이에 <예수님의 곁>이 열려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을 목적어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주어가 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곁>이 제자의 삶에 <목적어>이고, 예수님의 <말씀>이 제자의 길에 <주어>인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차이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발 곁에서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 곁을 삶의 목적어로 누렸고, 예수님의 말씀에 그의 삶의 주어의 자리를 넘겨 드렸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접대를 위해 염려하느라>, 예수님과의 <사귐>의 자리에 함께 한 자신의 <현재>를 마음껏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각자 삶의 자리에 정성스럽게 세운 묵상의 제단에 예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사랑과 은혜의 곁>을 내어 주시며, 예수님께서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 영혼을 부요케 하시기 원하십니다. 예수님 곁에 앉아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예수님과 함께 하는 <거룩한 현재/지금>를 풍요롭게 누리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총의 주 하나님, 주님의 자애로우신 손길이 우리 영혼에 닿아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 깊은 품이 우리를 끌어 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발 곁에 앉아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예수님의 임재를 누리는 <현재를 살았던> 마리아를 기억하며, 우리 삶의 현 주소를 찾게 하옵소서. 걱정과 염려에 휩쓸려 은혜의 빛 가운데 찾아오는 <보석같은 현재>를 놓치지 않고 살아가도록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