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롭고 인자하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 위에 늘 충만히 임하시길 기원합니다.

5월에 접어 들었습니다. 겨우 내내 ‘맨 몸’으로 서 있던 나무들이 연두빛 봄옷을 입고 우리를 봄의 숲과 들판으로 안내해 주는 변화와 생동의 계절에 우리 모두 들어서고 있습니다. 봄의 정원이 만들어내는 초록의 싱그러운 빛을 향해 우리 마음과 영혼의 창을 활짝 열고, 이 봄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우리 모두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부활절의 네번째 주일이면서, 어머니 주일입니다. 미국 역사에서 어머니의 날이 시작되는 그 기원으로 1868년 남북 전쟁 당시 사회 운동가이며 지역 사회 조직가였던 Ann Maria Reeves Jarvis 의 사회 운동을 꼽습니다. 그는 ‘어머니 우애의 날’을 조직하며 남북전쟁이 끝난 후 그 여파로 침체되어 있던 사회 분위기에 힘을 불어넣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는 남북 전쟁이 끝나고 3년이 지난 해에 남북 양쪽 참전 군인들을 초청해서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그들의 마음에 담겨 있던 앙금을 씻어내는 화해의 모임을 조직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멍들고, 찢긴 마음과 영혼에 전환과 회복을 위한 <디딤돌>을 놓고자 했던 앤 자비스의 이 운동은 어머니의 날이 설립되는데 영감을 준 활동으로 꼽힙니다. 이 영향으로 그의 딸 애나 자비스Anna Jarvis는 1905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어머니의 뜻을 기리는 공휴일을 만들려 힘썼고, 그는 마침내 ‘어머니날 국제학회’를 설립한 후, 이후 1914년에 Woodrow Wilson 대통령에 의해 5월 둘째 일요일이 어머니 날로 지정되게 됩니다.

전쟁 후, 사회의 안정과 공동체 정신의 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행해졌던 사회 운동이 어머니 날의 효시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합니다. 전쟁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깊게 멍들게 하고, 우리 삶의 곳곳에 상처와 흉터를 만들어 냅니다. 그 상처와 흉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기에, 전쟁 후 이루어졌던 화해와 화합, 그리고 정신적/심리적 위로를 도모한 하나의 사회 운동이 미국의 어머니 날의 효시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깊은 배움을 주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시작된 어머니 날인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을 만한 아름다운 시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시인 나희덕의 <우리 어머니>라는 시입니다. 시인은 충남 논산에 위치한 ‘에덴원’이라는 보육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청년 시절부터 순수한 신앙공동체를 꿈꾸고, 함석헌 선생의 글에 깊은 감명을 받은 신앙인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친지가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일을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시인은 보육원에서 태어났고, 보육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후 서울로 이사온 다음에도 어머니의 직장인 면목동 소재 ‘애향원’에서 스무살 어른이 될 때까지 있었습니다. 그는 부모가 있었지만, 고아들을 돌보며 <모두의 어머니>가 되었던 그의 어머니 곁에서 공동체의 소중함을 경험하며 자라났던 것입니다. (참고: 동아일보 2003년 1월 8일 기사, 글 박상건)  그의 어머니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섬기는 가운데, 보육원의 아이들 <모두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의 제목이 <나의 어머니>가 아닌, <우리 어머니>입니다. 그 시를 소개합니다.

자식이 너무 많으신 우리 어머니/ 나의 어머니라고 고집부리고 나면/ 웬지 미안해지는 우리 어머니 //  전쟁고아들이 자라서 자식들을 낳고/ 전쟁 아닌 전쟁으로 삶을 꾸려나갈 때까지도/ 여전히 그들의 따뜻한 둥지가 되어주시는 분 //   용달차 운전하는 길천이가/ 애인과 헤어져 위로받으러 찾아오고,/ 시집살이가 힘든 금숙이가/ 그 품에서 한참을 울다 가는 곳 //   놀고 있는 무성이에게/ 보증을 서주어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장가가는 용주가 지어준 옷 입으시고/ 어머니 자리에 대신 앉아 웃고 계신 분 //   그 많은 자식들과 내가/ 형제처럼 사는 세상 만드시려고/ 모두의 어머니가 되어주신 우리 어머니

어머니 날인 오늘 참 어울리는 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전쟁고아들이 자라던 보육원에서 시인의 어머니는 <모두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에게는 자식이 참 많았습니다. 또한 그들이 다 성장한 다음에도 그 모든 자식에게 어머니는 삶에서 위로를 찾을 수 있는 ‘따뜻한 둥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삶은 어떤 의미에서 또 다른 전쟁터이기에 시인의 어머니는 그 많은 자식들을 세상이라는 전쟁터로 떠나 보내고 그들이 들려갈 <쉴만한 품>과 다시 기운을 얻고 갈 <사랑의 샘터>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용달차 운전하는 길천이가 애인과 헤어졌을 때 찾아와 위로 받는 사랑의 품’이었고, ‘시집살이의 고단함을 안고 살던 금숙이가 찾아와 한참을 울고 가는 위로의 품’이었습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 무성이에게는 보증을 서주어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장가가는 용주가 지어준 옷을 입고 행복에 젖어 웃는 분’이 시인의 어머니셨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다음과 같은 아름 다운 노래로 그의 시를 마무리 합니다: “그 많은 자식들과 내가 형제처럼 사는 세상 만드시려고 모두의 어머니가 되어주신 우리 어머니.”

이 시를 읽으며, 세상은 진실되고 따뜻한 <사랑의 품>을 열고 있는 <어머니>에 의해 그 <온도>가 올라간다는 느낌을 얻었습니다. 차갑고, 냉정하고, 날카로운 세상 살이, 그리고 세상이라는 삶의 공간이 <전쟁터>와 같이 느껴지지만, 그래도 세상의 온도가 이만큼 유지 되는 것은 세상에 무수히 많은 <어머니의 품>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지금도 <사랑의 온도>, <포용의 깊이>, 그리고 <이해의 넓이>를 유지 하며, <어머니의 자리>에 앉아 빙긋이 사랑과 포용의 눈빛으로 웃으시는,  수많은 어머니의 미소와 웃음이 우리 살아가는 세상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예배 가운데 우리가 묵상하는 누가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아마도 어머니 주일인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의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요? 우리는 <선하고, 인자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길 꿈꿉니다. 세상 안에 삶을 위한 아름다운 <공간>과 <틈>을 만들며 살아가길 꿈꿉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세상을 열어 가는데,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로 이러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내게 사랑을 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기에, 그것만으로는 세상 안에 성장과 변화를 향한 중요한 기반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이 말씀은 이 아침, 우리에게 세상에 변화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열쇠>를 쥐어주고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에게 ‘좋게 대하여 주는 것,’ 그리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꾸어 주는 것’을 우리가 실행하며 세상을 살아간다면, 세상에 급격한 변화가 찾아올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이 좀처럼 세상 가운데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랑>에 세상의 변화를 향한 <열쇠>가 담겨있다고 우리에게 일러주고 계십니다. 세상 가운데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게 될까요? 그것은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맞추고 살아감에서 우리에게 조금씩, 조금씩 가능해 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기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먼저 힘입어 지금까지 살아 왔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로부터 얻고 살아 왔는지를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우리에게는 <선하고, 인자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 안에 삶을 향한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고, 사랑을 위한 <틈>을 확장하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활절 네번째 주일이며, 어머니 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것과 같이, 우리 또한 하나님의 그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세상 안에 펼치는 <에이전트>가 되어 살아갈 귀한 사명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음을 열고 드리는 이 예배 가운데 우리에게 변화를 향한 기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드리는 이 예배의 은혜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고, 우리의 결단 앞에 주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찾아오길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 <사랑의 새로운 질서>를 세워가는 것은 중요하면서, 또한 어렵습니다. 오늘 묵상한 누가복음의 말씀의 시작에서 우리 귀에 익숙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만났습니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 뺨도 돌려대고, 네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아라.’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접하면서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함을 공감하면서도, 또 한편 우리의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그 말씀이 <사랑의 새로운 질서>를 이 땅에 세워갈 것을 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의 새로운 질서는 <하나님께서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것 같이>, 우리 또한 인자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연습>하며, 살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원수는 늘 원수의 자리에 묶어 놓고 살게 되는 우리 세상살이에, 새로운 삶의 결을 세워가는 것… 미움이 우리 마음을 사로 잡으면 좀처럼 그 마음을 돌이키기 어려운 세상살이에, 새로운 마음의 창을 열어가는 것… 저주가 오가고, 모욕을 주고 받고, 서로의 뺨에 미움의 상처를 남기며 살아가는 세상살이에, 새로운 사랑의 품을 펼쳐가는 것… 우리에게는 이 어렵고 힘겹지만, 이 세상 가운데 <회복>하고, <새로 세우고>, <다시 정비>해야 할 <귀중한 새로운 질서>가 ‘사명과 지향점’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과 용서와 포용과 환대의 사명>을 감당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꿈을 펼쳐가는 아름답고 귀한 일에 함께 하고 있는 우리가 오늘 맞이하는 어머니 주일의 은혜는, 바로 <어머니의 사랑> 안에 우리가 닮아갈 <사랑의 질서>와 <사랑의 모양>이 담겨 있음을 깨닫는 데에 있습니다.

설교의 처음에 나눈 나희덕 시인의 시, <우리의 어머니>의 마지막 구절을 떠 올려 봅니다. “그 많은 자식들과 내가 형제처럼 사는 세상 만드시려고 모두의 어머니가 되어 주신 우리 어머니.”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는 <남/타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두의 하나님이시고, 모두의 주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인자하심을 상기시키시며,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라고 명하시는 예수님께도 <남/타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두를 사랑하고 용서하셨고, 모두를 위해 피를 흘리시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며, 모두를 위해 죽음을 물리치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질서>로 세상을 다듬어 가고, 이러한 <사랑의 품>으로 세상의 온도를 높여가기 위해 부름 받은 우리 모두가 이 아침, <우리의 어머니>를 떠 올리며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우리 마음 가짐을 새롭게 하고, 가지런히 정돈하길 소망합니다. 시인의 깨달음처럼, 세상은 <나의 어머니>에서 <우리 어머니>로 확장되는 과정 위에서 아름다워 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성> 혹은 <모성적 사랑>이라는 <하늘로부터의 선물>을 이 땅에 부어 주시며, 세상과 사람의 울타리가 <진실되고 따스한 사랑>으로 풍성해지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성적 사랑의 특징은 <무한한 확장성>입니다. 그 넓이를 가늠할 수 없이 넓게 퍼져가는 것이 모성의 사랑이고, 그 넓이를 헤아릴 수 없이 깊이 뿌리내리는 것이 모성의 사랑이며, 그 길이를 측정할 수 없이 길게 뻗쳐있는 것이 모성의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모성의 사랑의 <수혜자>이며, 동시에 <전달자>입니다. 모성의 사랑으로 복을 얻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 사랑의 힘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복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한국의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어버이 날/ 어머니 날 노래로 많이 알려진 동요가 있습니다. <어머님 은혜>라는 곡입니다. 감리교 목회자인 윤춘병 목사님이 쓴 글에 박재훈 목사님이 곡을 붙인 이 곡은 원래 어머니 날을 위해 만들어진 곡은 아니었습니다. 본래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쓰여진 노래였습니다. 1945년 해방 직후 종교탄압을 피해 평안남도 중화군에 가족을 남겨두고 남쪽으로 피신했던 윤춘병 목사님은 1948년 11월 어느 날 고열에 시달리며 신음하다 어머니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글로 표현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 글을 떠올려 봅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애 //  넓고 넓은 바다라고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넓은 게 또 하나 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바다 그보다도 넓은 것 같애” 우리에게 보통 이렇게 2절까지의 가사가 알려져 있는데, 실은 3절도 있습니다. “산이라도 바다라도 따를 수 없는/ 어머님의 그 사랑 거룩한 사랑/ 날마다 주님 앞에 감사 올리자/ 사랑의 어머님을 주신 은혜를” 본인의 신앙을 담아 어머님에 대한 감사를 표현한 이 부분도 참 좋지요? 이 노래에서 표현된 것처럼, 어머니의 사랑과 그 은혜는 ‘하늘만큼 높고, 바다같이 넓습니다. 그리고 산이라도 바다라도 따를 수 없이 어머니의 사랑은, 멀리 가고, 널리 퍼지고, 깊게 번집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자매, 형제 여러분, 우리가 누려온 <사랑의 은혜>와 <사랑의 힘>을 마음에 새기고 감사하는 오늘 이 어머니 주일에, 자비롭고 인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우리 어머니>의 사랑을 곱게 간직하며, 그 사랑의 <전달자>요, 그 사랑의 <열매>가 되어 이 땅 위를 우리 모두 걸어 나가길 기원합니다. 우리는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일터인 이 세상 위에서, 자비의 열매로, 인자함의 꽃으로 피어날 소명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발걸음에 주님의 자비와 은총이 늘 덧입혀지길 기원합니다. 아멘.

환영합니다
공동체와양육
예배와말씀
알립니다

How can We help?

음성으로 알려드리는 교회소식입니다

헌금안내

힘든 이 시기에 우리 교회가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그 사역을 감당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함께 해 주시기 바랍니다.

헌금방법은 현재로서 3가지입니다

1.은행을 통해 직접 Transfer하는 방법

2.헌금을 교회에 직접 보내는 방법

3.Bank of America를 통해 Online Transfer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