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생명으로 우리를 복되게 하시고, 우리 생명에 구원의 반석을 놓아 주시는,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꽃피는 봄길을 지나, 숲의 나무들이 연두빛 옷을 입어가는 봄숲을 지나고 있습니다. 봄나무에 찾아오는 <연두빛>은 봄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Prelude>과 같이 느껴지곤 합니다. 겨우내내 봄의 새순을 피우기 위해 고요히 생명의 담금질을 하고 있던 나무에서 연두빛 새순이 돋을 때면, 봄이 우리에게 <내가 여기 왔어!>라고 말을 건네는듯 해서, 마치 기다리던 친구를 기차역에서 맞이하는 것처럼 흐뭇한 미소가 얼굴에서 피어오르는 것 같습니다. 저는 봄을 맞이하는 나무의 새순을 표현하는 <연두>라는 우리말이 참 좋습니다. 영어로는 연두빛을 light green 혹은 yellow green이라고 표현합니다. 연두색을 yellow green이라고 하는 것은 노란색과 초록색을 섞으면 연두빛이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영어에는 연두색이라는 자체의 빛깔이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노란색과 초록색의 중간색이라는 의미가 큰 셈입니다. 이러한 점은 한자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한자어로는 연두색을 <황록색>이라고 표기합니다. 노란색과 초록색이 섞인 색이라는 의미입니다. 반면, 우리말 연두색은 노란색과 녹색의 중간이라는 의미가 아닌, 그 말 자체로 독자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말의 색에 대한 표현력을 드러내 주는 색깔 중 하나가 바로 <연두>인 셈입니다. 뉴잉글랜드에는 봄을 알리는 연두빛 나무잎이 대부분 사순절이 끝나고 부활절이 될 때 우리 시야에 들어오곤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연두빛 새순을 보고 있으면, 마치 그 연두빛이 주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색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보통 강단색깔이 부활주일이 지나서 성령강림절에 이르는 때가지 흰색으로 정해지 있지만, 만일 흰색 다음으로 다른 색깔을 선정해 본다면, 연두색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숲의 나무들이 연두빛 봄옷을 입는 이 부활의 계절에 주님께서 생명의 깊은 신비로 여러분 삶을 복되게 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부활절 세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현현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빛을 뚜렷하게 목격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우시는지를 묵상하는 시간을 우리 모두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여러 모습으로, 여러 자리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찾아가서> 발견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발견하게 하셨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부활 사건>에 있어서, 그 주체가 부활하신 주님이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흥미로운 점 한가지는, 부활 사건이 있기 전, 곧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예수님께서 걸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찾아오는 삶의 위기와 위협에 <순응>하셨고, 이 모습은 다분히 <수동적>으로 우리 눈에 비추어졌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사건을 거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장면이 펼쳐 집니다. 부활의 사건이 본질적으로 유한의 세계 바깥으로부터 세상 안으로 침투된 사건이기에, 부활하신 주님 외에 다른 모든 부활의 증인들이, 이제 <수동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휩싸여 안에서 문을 잠그고 있었던 제자들의 모습이 그러했고,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물고기를 잡던 제자들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그들 모두에게 예수님의 나타나심은 <뜻밖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그들은 그들 앞에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을 한 눈에 알아보지 못하기까지 합니다.

요한복음 21:1-8에는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신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미 닫힌 문을 뚫고 들어오신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경험을 지나온 제자들은, 어느 날 디베랴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기 위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그날 밤에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빈 그물을 들고 동틀 무렵 아침을 맞이하려 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들어 서셨지만, 어떤 영문인지 그들은 예수님을 또 다시 알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을 건네셨습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그들은 ‘못 잡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면 물고기를 잡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묵묵히 그 말씀을 따라 그물을 던졌고, 그들의 그물에는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제자들은 지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길에서 돌이켜서, 다시 물고기 잡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물고기를 잡던 어느날 <빈 그물>로 동틀 녘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께서 그들에게 찾아 오셔서 그들의 <빈 그물 가득> 물고기를 채워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다시 열어 주실 <생명과 소명의 문>을 암시하는 신비로운 사건이었습니다. 사람의 수고로 소득 없이 끝난 <그물질>을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손길로 단번에 풍성한 결과를 얻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의 주님께서는 고기잡는 어부로 돌아간 제자들의 <빈 그물>을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그물 가득 채워주신 고기를 끌고 해안으로 나온 제자들은 생각지 않은 선물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 차려 놓으신 아침 식탁을 발견한 것입니다. 숯불 위에는 생선이 놓여 있었고, 빵도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너라.”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는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땅으로 내렸습니다. 그물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들어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수고해도 얻지 못했던 고기를 얼마 되지 않는 순간에 그렇게나 많이 잡게 된 것입니다. 11절 말씀은 다시 한번 ‘고기가 그렇게 많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고 강조합니다. 많은 고기를 담아도 찢어지지 않은 그물은 아마도 이제 제자들이 함께 연대하여 만들어갈 <공동체>를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오른편>에서 역사해 주셔서 많은 고기를 낚을 수 있었고, 이제 제자들에게 주어진 일은 서로의 인생을 함께 엮어서 <생명의 복된 소식>을 담아서 전할 튼튼한 그물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물에 얼마나 많은 물고기가 잡혔고, 그 많은 물고기가 한 그물에 있었음에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즈음, 제자들은 말씀하시는 분이 <다시 살아나신 주님>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어두웠던 눈이 이미 밝아졌던 것입니다. 그들의 빈 그물이 채워짐을 통해 그들의 어두웠던 눈과 마음이 밝아졌고, 그들은 이제 부활의 아침식탁을 예수님과 함께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빵도 집어 주고, 생선도 주셨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께로부터 <생명의 신비>를 건네받게 된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에게는 자신들에게 공급된 <생명의 은혜>를 세상 가운데 전할 사명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을 서로 서로 엮어 튼튼한 <생명의 그물>을 만들 사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활의 예수님과 제자들이 아침식탁을 나눈 뒤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우리의 귀에 익숙한 질문을 건네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를 부르시는 호칭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하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반석이란 의미의 ‘베드로’란 이름을 얻기 전의 <시몬>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베드로에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아직 그가 <시몬>에서  ‘반석’이라는 의미의 <베드로>로 이행하는 하나의 과정에 있다고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옛 이름을 부르시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 물음은 <관계>에 관한 질문입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메시야’로 믿고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 그 길에서 돌이켜서 고기잡는 어부의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가 가던 길에서 돌아섰던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으시며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가 버리셨고, 자신은 그 과정에서 겁쟁이의 모습으로 숨어 있었으며,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그가 믿었던 예수님을 통한 소망이 더 이상 그의 삶에 힘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삶의 방향을 잃고 서 있었고, 자책감과 죄책감의 무게를 어깨에 지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곁에서 세워왔던 믿음과 소망이 허물어진 자리에 힘을 잃고 서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신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였습니다. 이것은 <관계에 관한 질문>이었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왜 소망과 믿음을 잃고 지금 그렇게 서 있는지, 그리고 왜 <그 때> <그 십자가의 자리>로부터 도망쳤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삶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 주시며, 그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고, 다시 일어설 용기가 <사랑의 관계>에서 비롯됨을 일러 주셨습니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질문 속에서 베드로를 향한 <사랑>을 느낍니다. 이 질문에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너도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를 일으켜 세워 주시려는 애정과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를 향한 포용과 용서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질문에 베드로는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확신있게 답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배신할 것이라고 예고하셨을 때, 그가 고개를 저으며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는 그런 확신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었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기에, 베드로는 확신있게 <네.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대신 그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 있었고,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배신한 사람이 자신이었고, 자신의 바램과 달리 자신이 더 이상 주님 곁을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예수님의 <사랑의 음성>에 기대어 답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아십니다. 하지만, 저는 감히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의 답변에는 아마도 이런 의미가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 고개 숙인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소명의 모자>를 씌워 주시며, 그를 <예수님의 일터>로 불러 주셨습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같은 대화를 두 번 더 반복하셨습니다. 그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같은 질문에 같은 답변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두 번의 대화를 <내 양 떼를 돌보고 먹이라>는 <초청의 말씀>으로 끝 맺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 <길>을 열어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하나의 길이 끝난 곳>에서 그냥 멈추어 서 있었습니다.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는 귀한 사역에 초대받아 힘차게 길을 걷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주님과의 유월절 만찬을 나눈 후 혼란에 휩싸입니다. 자신들의 발을 씻기시며, 서로의 발을 씻겨 주라고 명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마음에 담았으나, 그들은 곧 군인들에게 잡히시고, 빌라도의 법정에 서셔서 십자가 형을 선고 받고, 죽음 저 편으로 떠나 버리신 예수님을 지켜 보며, 혼란과 두려움과 좌절에 휩싸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자신들의 <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의 <설 곳>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들의 걷던 걸음이 자책과 죄책감의 막다른 골목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에 나누었던 것처럼, <그들의 길>이 끝난 곳에서, 주님께서 열어주시는 <주님의 길>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꿈을 마음에 싣고 걸어온 길이 끝난 곳에서, <주님의 꿈>이 그들 삶 깊은 곳에 침범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다른 세계가 생성되는 과정이었기에, 해산의 진통을 동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인생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태려는> 노력이었기에, 상실감과 실패감에 휩싸여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은 그 <상실과 실패의 경험>으로부터, 지금 <성장과 성숙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헨리 나우웬 이후로 우리 시대가 귀 기울여 온 영성가 리처드 로어는 그의 책 <물 밑에서 숨 쉬기>에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라는 중세의 수도사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성숙한 영성은 예외 없이 ‘떠나보내기’와 ‘배운 것 비우기’를 말한다. 그것은 절대적이다. 독일 신비주의 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했듯이, 영성생활은 ‘더하기’보다 ‘빼기’로 더욱 성장하는 것이다.” 리처드 로어의 말은 바로 제자들이 겪었던 <성장의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떠나보내기’를 통해 자신들의 욕심을 떠나 보냈고, ‘배운 것 비우기’를

통해 자신들이 갖고 있던 잘못된 메시야상을 내려 놓았습니다. 또한, ‘더하기’를 멈추고, ‘빼기’를 연습하며, 제자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부풀게 했던 꿈들이 ‘하나님 나라를 열고자 힘쓰셨던 주님의 그 꿈들’과는 어긋나 있었음을 깨우쳤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앞세우며 달려왔던 길 끝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차려 주시는 <아침 식탁>에서 주님과 떡과 생선을 나누며, <주님께서 열어 주시는 새로운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 중 베드로는 자신에게 세 번 <네가 나를 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께로 부터, <내 양을 먹이라>는 소명을 얻으며, <주님의 일터>로 다시 초대받았습니다. 그가 세 번 부인했기에 주님께서는 세 번 그로 하여금 <사랑의 관계>를 확인하시고, 세 번 그에게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시며, 그를 새로운 <거룩한 시작>으로 이끄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이러한 <성장 곡선>을 접하며, 우리에게는 어떤 <영적 배움>과 <영적 성장>의 기회가 열리고 있습니까? 실패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끝까지 찾아 가셔서, 그들의 돌이켰던 걸음을 다시 돌려 세우시는 부활의 주님을 바라 보며, 우리는 어떤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됩니까? <부활의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 삶 가운데 찾아 오셔서, 때로는 아침 식탁을 차려 주시고, 때로는 저녁 만찬을 차려 주시며, <삶과 소명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실패 가운데 좌절하고 있던 제자 베드로에게 <사랑과 관계>를 확인시키시며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셨던 주님께서, 여러분 삶의 문턱에 찾아 오셔서 <같은 소명의 길>로, 그리고 <같은 꿈과 소망의 계단>으로 부르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일터>인 세상으로 나아가, <부활의 소망과 구원의 소식>으로 <생명의 봄 소식>을 실어 나르는 사람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부활의 봄 소식으로 메말라 있는 세상의 모든 숲이 연두빛 봄 옷을 입어가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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