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주님께서 부활의 빛을 비추어 주시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길 소망하는 여러분 모두 위에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세상 가운데 <새로운 문>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문은 유한에서 영원으로 가는 문이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가는 문이며, 하나의 길이 끝난 곳에서 시작된 새로운 길로 들어서는 문입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열어주신 이 <새로운 생명의 문>으로 들어선 우리들이, 우리가 함께 올라선 이 <부활의 봄길> 위에서 부활의 빛을 증거하는 주님의 증인들로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부활을 현재화>시키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처음으로 접한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루어 주신 소망을 그 삶의 현재에서 살아내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부활이 <미래의 소망이 현재화 되는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부활의 현재성을 제자들이 깨닫는데는 과정이 필요했고, 주님의 이끄심/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묵상하는 말씀에서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주님께서 누워 계셨던 무덤이 비어 있음을 이제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빈무덤>으로부터 <부활사건을 현재화>하는데 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 두려웠고, 두려워서 밖으로부터 안으로 들어오는 문을 차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닫혀진 문을 뚫고 들어 오셔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었기에 마음의 안정이 필요했고, 3 년 동안이나 삶을 함께했던 주님 곁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죄책감 때문에 마음이 괴로웠으며,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해 불안하고 막막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의 마음이 닿아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 한 가운데를 향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건네신 평화의 인사를 통해 제자들은 어떤 위로를 얻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건네신 인사는 <보살핌의 인사>였고, <포용의 인사>였고, 두려움과 자책감/죄책감과 불안감에 마음이 무거워져 있던 제자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인사>였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건네 받은 <평화의 인사>로 인해 이제 제자들에게는 <일어설 수 있는 계단>이 그 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앞으로 걸어갈 <평화의 디딤돌>을 놓아 주시며, 두 손과 옆구리에 새겨진 상처, 곧 고난/죽음의 흔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에 새겨진 상처는 아픔의 흔적이면서, 죽음을 이겨낸 흔적이기도 합니다. 그 흔적 속에서 제자들은 이제 부활의 현실을 현재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두려움에 둘러싸여 꼼짝 못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를 건네시며 나타나신 예수님은, 다시 한번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하고 평화의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사는 제자들로 하여금 두려움의 밤이 끝나고 평화의 아침이 오게 되었음을 확증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인사 후 이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을 ‘쫓아온 <제자>’에서 ‘보냄을 받는 <사도>’가 되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빛>을 보았으니, 이제 그 빛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두려움을 떨쳐내고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한 용기를 내라는 명령이고, 부활을 경험했으니 이제 부활을 <살아내라>는 명령이고, 부활은 곧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이니 그 거룩한 새로움으로 초대하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 살아가라는 명령입니다. 이러한 위중한 명령을 전하시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룩한 성령의 숨>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어 넣어 주신 이 거룩한 숨결에는 <용서의 숨결>이 담겨 있었고, 새로운 존재로 빚어 주시는 <창조의 숨결>이 담겨 있었습니다. 용서를 받았으니, 그 용서의 은혜를 전하며, 또 다른 이를 용서로 품으며 살라고 명하시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던 사람들을 이제 당신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는 사람들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시고, 그들에게 성령의 숨결을 불어 넣어 주시는 것을 경험하며, 인생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받은 그 자리에, 도마는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료 제자들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동료들이 확인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기만 하고도 도마가 믿었다면 이상적이었겠지만, 직접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던 그가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은 <영적인 정직함>이기도 합니다. 믿지 못하겠는 것을 믿는 척 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도마’ 라는 이름 앞에 ‘의심 <많은>’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합니다. 다분히 부정적인 뉘앙스가 담긴 수식어입니다. 도마는 부활한 예수님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고, 그래서, 그는 실증적인 경험, 곧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그 못자국에 손을 대어 보고, 또한 예수님의 옆구리에 있는 상처를 확인해 보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믿을 수 없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품을 수 있는 ‘질문’과 ‘회의’를 <언어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 소식을 전해 듣고, <내 눈으로 보고 감각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소!> 라고 말하는 도마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도마와 달리 보지 않고도 부활 소식을 믿을 수 있나요? 아니면, 도마처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아야 믿을 수 있나요? 질문과 회의에 휩싸인 도마의 모습은 어쩌면 초대 교회에서 씨름했던 신앙적 문제를 드러내 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따라서,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전해 들은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사도 바울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길 위에서 만나며, 부활 신앙을 얻게 된 사람도 있었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아마도 보지 않고 부활 신앙에 참여해야 하는 신앙적 과제와 씨름했을 것입니다. 도마는 어쩌면 초대교회 신앙인들이 씨름해야 했던 <신앙적 과제>를 대변해 주는 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침내,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며 소리높여 자신의 신앙적 고민을 털어 놓았던 도마 앞에, 예수님께서 마침내 나타나셨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커다란 의문을 품고 있었던 도마에게 예수님께서는 <여드레 뒤>에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회의와 의문의 바다>를 헤엄치도록 그냥 놔 두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질문을 안고 씨름할 시간을 도마에게 주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전에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듯, 잠긴 문을 통과해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시며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고, 이번에는 그 자리에 도마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도마의 고민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헤엄치고 있는 회의의 바다에 대해 잘 알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 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도마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의 상처를 손으로 만져 보았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 도마에게 모든 것이 분명해진 순간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의문과 회의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 여부를 찾고 있던 도마에게 예수님께서는 그가 고민을 떨쳐낼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가 원하는 바에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도마는 그 순간 자신의 의문과 회의로 부터 벗어날 출구를 얻었습니다. 자신 앞에 서 계신 분이 누구인지 선명하게 보게 된 것입니다. 의심의 안개 걷히고, 자신 앞에 서 계신 부활의 예수님 얼굴이 맑게 그의 눈에 들어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은 사람은 복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보지 않고도 부활의 진리를 깨우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도마로 하여금 의심을 떨쳐 내도록 정성스럽게 그를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은총과 사랑의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돌보십니다. 도마는 도마대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그 사람대로… 보지 않아도 믿으면 이상적이겠지만,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하여 그 마음을 예수님께 숨길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는 모두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첫 증인들은 <어둠 속을 걷는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삶에서 죽음 저 편으로 넘어가 버리신 때, 그들 곁에는 더 이상 주님께서 살아계신 모습으로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꿈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꿈을 잃어버림과 함께 그들이 걷던 길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께서는 어둠이 내려앉은 그들의 삶의 자리에 <희망의 별>을 띄워 주셨습니다. <부활>이라는 <생명과 구원의 별>을 띄워 주셨습니다. 길이 끝난 곳에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고, 꿈도 저물고, 희망도 저물게 되어 끝이라고 여기게 된 삶의 자리에 <부활의 맑은 아침>과 <새로운 인생의 출발선>을 열어 주셨습니다. 시인 백창우는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라는 시에서, 끝이라고 생각하여 막막해진 우리 삶에 찾아오는 <새로운 기회>에 대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렇게 아무런 꿈도 없이 살아갈 수는 없지

가문 가슴에, 어둡고 막막한 가슴에

푸른 하늘 열릴 날이 있을거야

고운 아침 맞을 날이 있을거야

길이 없다고,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대, 그 자리에 머물지 말렴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그 길 위로 희망의 별 오를테니

길을 가는 사람만이 볼 수 있지

길을 가는 사람만이 닿을 수 있지

걸어가렴, 어느 날 그대 마음에 난 길 위로

그대 꿈꾸던 세상의 음악이 울릴테니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이제부터 걸어갈 길 사이에

겨울나무처럼 그대는 고단하게 서 있지만

길은 끝나지 않았어, 끝이라고 생각될 때

그때가 바로, 다시 시작해야할 때인걸

꿈을 잃어버려 막막한 가슴으로 살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꿈을 잃고나니, 두려움이 한 없이 밀려와 아무도 찾지 못하는 외진 곳에 문을 닫아 걸고 있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후회와 자책감과 죄책감에 무거워진 마음이 그들의 눈을 가려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던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있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출구 없는 벽을 마주하며 그들이 안에서 단단히 걸어 잠근 문 바깥으로부터 <평화의 인사>를 건네시며, <푸른 하늘>과 <고운 아침>을 <손>에 들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길이 없다고,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이제 더 이상 그 자리에만 머물려 하지 말고, 내가 닦아 주는 <새길>로 힘껏 걸어나가라’고 속삭이시며, <길 위의 희망의 별>로 솟아 오르셨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의 끝에서 더 이상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겨울나무>처럼 고단하게 서 있던 제자들에게 <길은 끝나지 않았다>고, <끝이라고 생각한 바로 여기에서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그들로 하여금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갈 것>을 염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삶은 <부활의 아침>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여정 속에 길이 없다고 여기는 때, 혹은 길이 보이지 않는 때, 우리의 삶이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 <아침>으로 이어져 있음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우리는 꿈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꿈, 곧 <하나님 나라>를 저 하늘과 같이 이 땅에 이루어가는 그 꿈은 우리를 숨 쉬게 하는 <인생의 호흡>과 같은 꿈입니다. 부활절 둘째 주일을 맞는 이 아침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닫힌 문을 뚫고 우리 삶으로 들어 오셔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시며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우리 삶을 통해 <현재화>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시는 <평화의 숨결>을 호흡하며, 부활의 증인으로 세상과 사람 가운데 <화해와 회개와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전하며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이 귀한 사명 가운데 살아가는 것과 함께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 소식을 전해 듣고도 그 사실을 믿지 못해 <어둠> 가운데 있었던 도마를 주님께서 끝까지 도우셔서, 부활의 증인으로 세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비록 부활의 예수님을 찾아 서성이며 걷던 도마같은 인생의 때를 만나더라도, 그를 찾아주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또한 찾아오심을 잊지 맙시다. 우리 모두를 때를 따라 도우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여러분 위에 풍성히 임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환영합니다
공동체와양육
예배와말씀
알립니다

How can We help?

음성으로 알려드리는 교회소식입니다

헌금안내

힘든 이 시기에 우리 교회가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그 사역을 감당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함께 해 주시기 바랍니다.

헌금방법은 현재로서 3가지입니다

1.은행을 통해 직접 Transfer하는 방법

2.헌금을 교회에 직접 보내는 방법

3.Bank of America를 통해 Online Transfer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