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각자의 자리에서 5분간 말씀을 묵상하고,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마칩니다.
월요일 (5/16): 그들 가운데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감 장수로서, 두아디라 출신이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 주님께서 그 여자의 마음을 여셨으므로, 그는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 여자가 집안 식구와 함께 세례를 받고나서 “나를 주님의 신도로 여기시면, 우리 집에 오셔서 묵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우리를 강권해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사도행전 16:14-15)
>>묵상: 루디아는 바울이 빌립보 선교 과정에서 만난 사람입니다. 바울에게 빌립보 선교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소명을 ‘이방 선교를 위한 사도’라고 믿었던 바울이 첫번째로 이방선교를 한 곳이 빌립보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빌립보 교회를 향한 편지의 시작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가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늘 기쁜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여러분이 첫 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3-5) 이렇게 바울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졌던 빌립보 선교의 시작에서 바울은 그 곳에서 ‘자색 옷감 장수’를 하던 루디아를 만나게 됩니다. ‘자색 옷감’은 아주 호화로운 옷감으로 조개류에서 추출된 염료로 만들어졌고, 주로 페니키아와 두로에서 생산되어 유통되던 귀한 옷감이었습니다. 루디아가 빌립보에서 자색 옷감 장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빌립보가 퇴역한 군인들이 모여 살던 로마의 주둔지였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였던 빌립 왕의 이름을 따서 세워진 도시 빌립보는 당시 커다란 해전이었던 악티움 해전 이후로, 더욱 많은 병사들이 유입되어 활발한 도시가 되었고, 루디아는 이 빌립보에서 값비싼 옷감을 취급하던 상인이었습니다. 빌립보에는 회당이 없었기 때문에 바울을 비롯한 그의 일행은 안식일에 성문 밖으로 나가서, 유대 사람이 기도하는 처소가 있음직한 곳을 찾다가 루디아를 만나게 됩니다. 바울 일행은 루디아가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고, 바울은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을 깨닫습니다. 마침내 루디아 뿐만 아니라 집안 식구가 세례를 받게 되었고, 이후 루디아는 바울의 조력자가 되어 이방 선교를 위한 부르심을 감당하던 사도 바울을 돕게 됩니다. 바울과 루디아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닫습니까?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이 담긴 <복음>, 곧 <복된 소식>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가교>와 같습니다. 서로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불현듯 <친밀감>을 갖게 하는 힘이 <복음>에는 들어 있습니다. 바울과 루디아를 연결시켜 주었던 것이 바로 이 복음의 힘이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 가 되는 중요하면서도, 두렵고 떨리는 소명을 감당하는 그 시작에, 바울이 전하던 <복음>은 <믿음의 벗>을 얻게 연결하는 <다리>가 되어 주었고, 바울은 그 만남으로부터 첫 이방 선교지였던 빌립보 선교를 위한 힘찬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이야기를 묵상하며, 우리 삶에 이루어지는 <만남과 사귐의 신비>, 그리고 <우리의 비전>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길 기도합니다.
>>기도: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는 주님, 이 땅에 주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총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희생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깨닫게 하시니 감사 드립니다. 이 복음의 진수를 전하고자 부지런히 뛰어 갔던 사도 바울은 자신이 소명으로 발견한 이방 선교를 위해 힘껏 헌신했습니다. 그의 열심을 기뻐하신 주님께서 빌립보 선교의 과정에 루디아를 만나게 하셨고, 그 만남을 통해 바울이 자신의 소명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섬세한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기억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컨텍스트 위에서 복음을 전하는 귀한 사명을 성실하고 힘차게 감당할 수 있게 도와 주옵소서.”
화요일 (5/17):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그의 이름을 노래하여라. 광야에서 구름 수레를 타고 오시는 분에게, 소리 높여 노래하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그 앞에서 크게 기뻐하여라. 그 거룩한 곳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을 돕는 재판관이시다. 하나님은 외로운 사람에게 머무를 집을 마련해 주시고, 갇힌 사람들을 풀어 내셔서, 형통하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은 메마른 땅에서 산다. (시편 68:4-6)
>> 묵상: 하나님께서는 찬양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거룩한 능력으로 세상의 질서를 놓으시고, 우주의 만물을 있게 하시며, 아무도 닮을 수 없는 힘과 위엄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능력과 거룩한 위엄을 가지신 분을 찬양하는 다윗의 시편에서, 오늘 묵상하는 말씀 가운데 이러한 표현을 만납니다.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그 앞에서 크게 기뻐하여라. 그 거룩한 곳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을 돕는 재판관이시다.”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춤추게 하고 땅이 흔들리게 할 수 있는 거대한 능력을 소유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윗의 언어>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하신 것은 산을 평평하게 하고 바다를 흙으로 메울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니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윗의 노래처럼 하나님께서는 <고아들의 아버지>이시고, <과부들을 돕는 재판관>이시기 때문입니다. 약자를 돌보시고, 그들에게 가장 따스한 <곁>을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총과 사랑이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요, 근거입니다. 우리는 보통 누군가의 능력을 셈할 때, 양적 능력을 셈하고, 눈에 보이는 부피와 크기를 측정하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도 우리의 이러한 계산법을 활용해서 헤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지으신 능력으로 들판의 풀 한포기를 정성스럽게 돌보시는 분입니다. 하늘을 있게 하고 땅을 기초를 놓으신 능력으로 숲의 나무 한 그루를 쉬지않고 돌보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에 우리의 눈길이 머물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찬양할 합당한 근거/이유를 온전히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영혼을 향해 들려 주는 다윗의 찬양 소리에 마음을 모으기를 소망합니다. 다윗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머무를 집을 마련해 주시고, 갇힌 사람들을 풀어 내셔서, 형통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돌봄과 사랑의 모습을 깊이 깨달으며, 하나님께서 <세밀히> 돌보시는 세상의 구석구석에 눈을 뜨길 기원합니다.
>> 기도: “주님, 하나님께 찬양의 노래를 드리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본분입니다. 주님을 경배하고, 주님을 찬양할 많고 많은 이유가 있지만, 오늘 다윗의 시편을 묵상하며, ‘고아들의 아버지’요, 과부들을 돕는 재판관이신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에게 머물 곳을 마련해 주시고, 갇힌 사람들을 풀어 내어 주시는 주님을 경배했습니다. 세상의 그늘지고 어두운 자리에 따스한 햇살과 맑은 빛을 비추어 주시고자 오늘도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를 가꾸는데 성실하신 주님, 주님의 손길로 우리의 손길을 복되게 하셔서, 우리가 돌보아야 할 소명 가운데 경험하는 주님의 섬세하고 다정한 사랑을 세상에 선물로 나누어 주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수요일 (5/18):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도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요한복음 14:1-6)
>> 묵상: 오늘 묵상하는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고별설교>라고 불리우는 부분의 시작입니다. 요한복음 14:1-16:33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하시는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의 예수님 말씀을 떠나시기 전 마지막으로 당부하시는 고별인사와 같기 때문에, 고별설교라고 부릅니다.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이 고별설교가 귀한 것은 다른 공관복음에서는 이렇게 상세하고 길게, 떠나시기 전 예수님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는 말씀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다가올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아직 그 모든 앞 일을 짐작하지 못하는 제자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현실을 맞을 때,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을 의지하여 고난과 어둠을 이겨나갈 것을 소망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에 대한 당부>로 고별설교를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믿음>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곧 <아버지의 집>으로 떠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떠나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장차 있을 곳>을 마련하기 위해 떠나시기에, 떠나시지만 <꼭 돌아오실 것>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도마의 질문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 은 <지리적인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나와있지 않기에 그 곳은 지도를 보고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도마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의 <지리적인 위치>를 묻고 있습니다. 그가 갖고 살아온 지도에는 예수님께서 장차 가실 곳이 표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답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아버지의 집’이었고, 그곳은 세상의 지도에 기록된 곳이 아닌, <구원의 길> 되시는 예수님을 <삶의 길>로 걸어 이를 수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지시>해 주시는 분이시면서 동시에 그 <길 자체>이시기도 합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는 분이시면서 동시에 <진리 그 자체>이시기도 합니다. <생명>의 문을 열어 주시는 분이시면서 동시에 <생명 그 자체>이시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서 우리 삶의 길을 찾고, 진리를 깨우치며, 생명의 기쁨을 누리길 기원합니다.
>> 기도: “은혜와 사랑의 주님, 아버지께로 가시기 전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믿음을 가질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장차 겪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앞에서 <믿음의 눈>을 떠서 아버지께로 난 <길>을 볼 것을 당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믿음의 하룻길을 걷습니다. 아버지께로 향하는 <길을 보여주시며> 동시에 그 <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도 우리가 걸어갈 <생명과 진리의 길>로 걸으며, 믿음의 도약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목요일 (5/19):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 빌립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요한복음 14:7-11)
>> 묵상: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지킬 것>을 당부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의 의미는 아들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이미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본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의 <친밀성>을 강조하신 이 말씀을 듣고 빌립은 말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빌립은 자신이 예수님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둔감함이 사람을 이와 같이 무지 가운데 머물게 함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예수님 곁을 걸으며 보고, 듣고, 경험한 것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빌립의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 아버지의 모습이 <성육신하신 말씀>으로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기에,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믿음>을 지니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빌립과 같이 주님을 보면서도 주님을 보지 못하고,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참으로 주님과 함께 있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믿음의 눈> 이 가려져 있으면 <빛>을 <빛>으로 깨닫지 못하며, <길>을 <길>로 경험하지 못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어둠을 경험하고 있다면, 그것은 <믿음의 눈>이 어두워져서 입니다. 아버지와 하나이신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것처럼,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며, <믿음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나가길 기도합니다.
>> 기도: “은혜의 주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찾아왔습니다. <몸>으로 찾아온 그 말씀이 우리 생명에 구원과 복의 길을 열어 주어서, 우리 모두 죄와 사망의 길에서 벗어나 구원과 기쁨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보며 살아왔음에도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던 빌립의 모습을 보며,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도와 주십시오. 주님, 손에 보석을 들고 그 보석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처럼 영혼에 입혀진 구원의 의복을 깨닫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모습은 아닌지요? 우리의 무지의 구름을 걷어가 주시고, 믿음의 눈이 활짝 열리도록 도와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은총을 선명하게 깨닫고, 부활의 신비에 온 삶의 창이 열리게 하옵소서.”
금요일 (5/20):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안다.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조금 있으면,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 (요한복음 14:15-21)
>> 묵상: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예수님의 계명’은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여라> 는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지킬 <새 계명>으로 주셨고, 오늘 묵상하는 요한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서로 사랑하라고 명한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사랑하면>, 우리는 사랑하는 그 사람을 향해 우리 자신을 개방하게 됩니다. <사랑하면>, 우리는 사랑하는 그 사람을 향해 무한의 신뢰를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우리 자신을 예수님을 향해 무한 개방하게 되고, 예수님을 향해 무한의 신뢰를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보혜사>를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 곁을 떠나감을 짐작하신 예수님께서 ‘위로자’요, ‘권면자’인 보혜사, 곧 ‘파라클레토스’를 보내 주셔서, 우리가 홀로 있지 않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이 약속에서, 우리를 세밀히 살피시고 돌보시는 예수님의 깊은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시며, 어둡고 캄캄한 인생의 밤을 맞아도 우리가 여전히 <보혜사> 성령의 돌보심 속에 있음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렇다면,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 속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고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할 일은 <주님께서 주신 그 계명>을 정성스럽게 우리 손에 받아서, 우리 삶을 통해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며, 우리 삶을 <우리가 받은 사랑>으로 물들여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하룻길 위에서 우리는 어떤 사랑의 꽃을 피우고, 어떤 사랑의 열매를 맺으려 합니까? 우리가 정성을 쏟는 <사랑의 노력> 곁에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기도: “자비롭고 선하신 주님,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하루를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을 사랑한다 말로만 드리는 고백이 아닌, 우리의 삶과 행위와 영혼과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 위에 든든히 두 발을 딛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오늘 우리가 걷는 삶의 길 위에서 ‘미움’에 사로 잡히지 않게 도우시고, 우리가 받은 사랑으로 세상과 사람을 물들여 갈 수 있게, 보혜사 성령의 손길로 도와주옵소서.”
토요일 (5/21):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너희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다시 온다고 한 내 말을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14:26-29)
>> 묵상: 이미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을 하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아마도 앞으로 제자들이 겪을 <예수님의 부재>가 그들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바램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떠남>과 보혜사 성령의 <오심>은 예수님의 부재로 인해 제자들이 느낄 <영적 공백> 혹은 <심리적 상실감>을 해소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자녀들을 외롭게 홀로 두지 않으시기에,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를 통해 보혜사 성령이 아들의 떠난 자리에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떠나신 예수님의 자리에 오실 보혜사 성령이 제자들 가운데 행하실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동고동락하며 가르쳐 주신 것을 <떠오르고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기억의 현재화’는 우리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망각의 바다로 떠나보내서는 안될 것들을 우리가 지니고 사는 것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십자가의 은총과 부활의 신비는 기억의 현재화를 통해 우리의 오늘에 끊임없이 되살아나야 하는 영적 보석들입니다. 보혜사 성령께서는 바로 이러한 기억의 현재화를 돕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 제자들 가운데, 그리고 우리 가운데 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혜사 성령의 역할을 가르쳐 주신 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는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길 위를 걷고 계시고, 예수님 곁을 걷고 있는 그 제자들에게도 같은 운명이 예상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그 제자들 앞에 다가오는 것은 평화가 아닌 혼돈의 시간이었습니다. 고요함 아닌 소란함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남겨 준다’고 말씀하시고, ‘내 평화를 너에게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의 그 다음 말씀에 해답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삶의 조건을 따라 변하고, 요동치는 평화입니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평화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예수님 안에서 얻는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평화의 울타리가 되어 주시는 평화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예수님의 존재와 접속되어 있으면, 그 평화는 삶의 외부적 조건을 따라 요동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평화를 남겨 주시며, 앞으로 오실 <보혜사 성령>의 손길을 붙잡고, <평화의 행진>을 해 나아갈 것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다시 한번 약속하시며, 떠나시는 그 자리가 공허하게 비어있지 않을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남기신 가르침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시는 보혜사 성령의 동행을 소중히 여기며,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닌,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께서 열어 주시는 평화와 생명의 문을 향해 꾸준하고, 성실하게 나아가게 하옵소서.”